[시론-권혁] ‘9·15 합의’ 일석삼조 돼야 기사의 사진
우여곡절 끝에 노사정 합의가 성사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은 무겁다. 합의의 모호성이 마뜩지 않은 경영계의 불만도 그렇고 권력에의 굴복이요, 야합이라는 노동계 내부의 비판도 쓰리다. 향후 험난할 입법 과정도 마음에 걸린다. 총선을 불과 몇 개월 남겨둔 상황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야 하는 정치인들이기에 국회에서의 공방은 치열할 것이 틀림없다. 노동개혁은 노사정 합의로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하지만 노사정 합의 과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크다. 노동개혁의 성공을 위한 선결요건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 바로 노사정의 ‘신뢰’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이번 노사정 대타협의 핵심 쟁점은 ‘취업규칙 변경’과 ‘일반해고지침’이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노사정 합의를 어렵게 만든 것은 일반해고지침도 아니요, 취업규칙도 아니었다. 그것은 ‘불신’이었다.

밤낮없이 대화를 통해 핵심 쟁점을 해결하려 애썼다지만 민망할 정도로 서로의 얘기만 반복했을 뿐이다. 복잡한 논리나 이론은 그저 현란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해고지침이 결코 법에 우선할 수 없다지만 불신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신뢰가 없는 이들 사이에서 합의는 불가능하다. 노사정 대타협은 처음부터 결렬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계가 어려운 결단을 해 주었다. 일단 믿어보자며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노사정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한 약속이 진실한 것이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쉬운 해고’에 대한 노동계의 우려도 보란 듯 말끔하게 씻어주어야 한다.

지금 법대로라면 사용자는 그 어떤 사유로도 일단 해고할 수 있다. 그게 정당한 해고인지는 법정에서 따져보자고 하면 그만이다. 생전 법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평범한’ 근로자들로서는 그냥 감내하고 말기 십상이다. 번거로운 분쟁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해서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근속연수가 다른 선진 외국에 비해 현저히 짧은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무리 심각한 해고 사유가 있더라도 일단 분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관공서에서 ‘편지’만 와도 가슴이 철렁하는 ‘평범한’ 사용자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변호사에게 목돈 써가면서 해고 분쟁을 거듭하고 나면 진절머리를 내게 된다. 사용자가 해고 제도의 경직성 운운하면서 하소연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가깝고, 누군가에겐 너무 먼 해고 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해고권을 남용하는 사용자에게는 ‘엄중한 경고장치’가 제공되어야 한다. 근로자가 손쉽게 해고 분쟁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한 매뉴얼’도 필요하다. 딱 여기까지다.

‘쉬운 해고’를 위한 해고지침이라면 여기에 공감할 국민도 없고, 이를 실행할 간 큰 정치인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노사정 간의 신뢰 구축이 영영 물 건너갈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아무리 화려한 궁전이라도 모래 위에 지으면 소용없다. 노동개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사정 신뢰를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개혁이 가능하다.

역설적이지만 ‘쉬운 해고’ 논쟁이 부디 노사정 신뢰 회복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정규직 문제도 해소하고, 청년 일자리도 창출하며, 게다가 노사정 신뢰까지도 단단하게 만드는 노동개혁이라면 이거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닌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이다.

권혁(부산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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