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3부)] 하나님 안에서 닫힌 문 열고 남북 화해 이끌었다

제3부 전후 한국교회의 민주화·통일운동-<2> 남북 가교 역할 한 재외한인 크리스천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3부)] 하나님 안에서 닫힌 문 열고 남북 화해 이끌었다 기사의 사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지난해 6월 스위스 보세이에서 ‘한반도의 정의·평화·화해에 관한 국제회의’를 열었다. 국내외 교계지도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단상 뒤로 왼쪽부터 울라프 픽쉐 트베이트 WCC 총무,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리정로 조그련 부위원장,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가 보인다. WCC 제공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한반도 분단 후 해외교회와 재외한인 크리스천들은 남북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해외교회는 남북이 만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 왔고, 재외한인 크리스천들은 각계에서 남북 화해와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하나님 안에서 남북은 열려 있었다.

◇남북 화해 촉매제인 재외한인교회=남북은 분단 후 처음으로 1972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통일 원칙으로 하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남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내 민간인이 북한 측과 직접 교류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만남도 엄격한 잣대로 처벌했다. 그러나 재외한인들은 달랐다. 외국 국적을 갖고 있는 재외한인들은 자유롭게 북측과 접촉하며 남북 화해의 촉매 역할을 했다.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을 역임한 고 이승만 목사는 78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중동 담당 총무로 일할 때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이 목사의 부친은 6·25전쟁 당시 순교한 이태석 목사다. 이승만 목사는 6·25전쟁 때 모친과 여동생들을 북에 남겨두고 남으로 피난했다. 이태석 목사와 친분이 있던 강량욱 당시 조선기독교도연맹위원장이 가족을 상봉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방북해도 ‘친북 인사’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목사는 “통일은 성경적으로 보면 화해 운동”이라며 ‘화해 목회’를 주창했으나 오랫동안 주변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가 미국장로회(PCUSA) 선교부 총무로 일하던 86년 PCUSA와 NCCUSA는 한반도 화해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과 선언문을 채택했다. 재미한인들의 노력이 컸다. 같은 해 미국교회 대표단 10명이 남북한을 동시 방문했다. 방문단에는 이승만·김인식·손명걸 목사 등 한인 목회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교회는 이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적극 동참했다.

60∼70년대 2만명 가까운 간호사와 광부가 독일로 파견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독일한인교회가 생겨났다. 재독한인교회협의회는 독일복음주의교회협의회(EKD)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남북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일교회는 81년 한국교회와 한독교회협의회를 구성할 정도로 한반도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EKD는 89년 독일 개신교의 날에 북한교회를 공식 초청했고, 남북교회는 독일 베를린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재독한인교회협의회는 당시 예배에 사용한 걸개그림을 북측에 선물했다. 이 그림은 평양 봉수교회에 걸렸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90년대 중·후반 재독한인교회협의회는 의약품과 분유 등 구호물자를 북한에 보냈다. 당시 협의회에서 통일분과를 맡고 있던 송병구(색동교회) 목사는 “재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90년대에 교회를 통해 의약품 등을 모아 북한에 보냈다”고 전했다. 당시 이 구호사역에 참여한 재독한인교회는 20여곳이었다.

재독한인교회협의회와 교류해 온 EKD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여러 차례 독일로 공식 초청했고, 조그련도 이에 화답해 EKD와 재독한인교회협의회를 북한으로 초대했다. EKD는 오는 12월 4∼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교회-남북교회 평화통일 콘퍼런스’를 연다. 송 목사는 “EKD가 재독한인크리스천과 함께 남북교회 간 교류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같은 분단국가로서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북교류 견인한 해외교회=해외교회는 남북교회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했다. 84년 일본 도잔소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회의’는 민간 차원의 첫 남북교류였다. 전체 형식은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위원회가 주관했지만 내용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주도했다. 당시 실무는 WCC 국제위원장이던 고 나이난 코시 박사와 NCCK 통일연구원장이던 고 오재식 박사가 맡았다. WCC 등에서 일한 고 강문규 목사와 박상증 목사, 박경서 박사도 나섰다.

도잔소회의에 참석했던 안재웅 전 YMCA 이사장은 “한반도로 보면 남북의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교회가 처음으로 화해의 메시지를 나눴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냉전의 주체였던 미국과 러시아 교회의 관계자도 참석해 세계 평화와 화해를 강조한 것도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인사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도잔소회의를 지지하고 개최를 환영하는 축하 전문을 보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북측과의 교류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오 박사는 2009년 한 강좌에서 “한 교단장이 도잔소회의에 참석한 러시아정교회 주교에게 묻더라. ‘북한에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러자 주교가 빙긋 웃으며 ‘북쪽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교단장은 그 말에 당황했다. 당시 한국교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회고했다.

후속으로 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교회 지도자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1차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자협의회였다. 남북 목사들이 손잡고 공동으로 성찬 예식을 인도했다. 86∼87년 WCC는 두 차례 북한을 다녀왔고 미국 PCUSA와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대표단도 방북해 남북교회의 교류와 화해에 힘을 보탰다. NCCK는 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인 ‘88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7·4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에 ‘인도주의’와 ‘민의 반영’이라는 2가지 원칙을 추가한 것이다. 교계의 88선언은 당시 학생운동 등 민간의 통일운동과 같은 해 발표된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북교회는 분단 50년을 맞는 95년 희년을 기념해 십자가를 교환했다.

해외교회의 지원은 2000년대 초반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남북관계가 냉각된 2000년대 후반 이후에도 해외교회의 지원과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WCC는 2013년 10차 총회를 부산에서 열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선언을 채택한 데 이어 지난해 스위스 보세이에서 도잔소회의 30주년 기념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는 장상 WCC 공동회장, 강명철 조그련 위원장, 김영주 NCCK 총무 등이 참석했다.

WCC는 다음달 24∼30일 평양에서 ‘한반도 에큐메니컬 포럼’을 연다. 세계교회 지도자, NCCK, 조그련 대표자가 평화통일과 북한 개발·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장 공동회장은 “보세이회의에서 화해에 관한 강 위원장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설교를 위해 성경을 3차례 통독했다고 하더라. 평양 회의에서 좋은 결실이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