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3부)] “통일 위한 투자” 남북 교류 앞장서 온 사랑의 손

제3부 전후 한국교회의 민주화·통일운동-<3> 한국교회의 대북 지원과 남북 교회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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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한국기독교 북한동포후원연합회 관계자가 1999년 10월 인천항에서 밀가루 비료 등 지원물자를 방북 대표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된 물자에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기독교’가 명시됐다. ②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관계자들이 2002년 10월 인천항에서 북한의 씨감자 생산 지원용 물자를 선박에 실은 뒤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③예장통합이 재건축을 지원한 평양 봉수교회. ④기독교대한감리회의 지원으로 재개원한 평양신학원. ⑤한국기독교 북한동포후원연합회가 모금을 통해 마련한 X선 검진차량 및 구호물품과 인도요원들이 1998년 10월 인천항에서 북한 남포항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⑥‘선한 사람들(국제구호개발기구 굿피플의 전신)’ 임직원 등이 2003년 인천항에서 국제옥수수재단과 함께 옥수수 종자 20t을 북한에 보내기에 앞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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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남북 대결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남북 주민의 단순한 연락이나 만남도 간첩행위로 간주되곤 했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남북 대화 국면이 조성되곤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을 전후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한반도에도 해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 경험을 발판으로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한국교회였다. 이후 남북관계가 화해와 경색을 오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인도적 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국교회, 북한의 문을 두드리다=90년 7월 21일 홍콩 주룽반도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김경래 사무총장과 유상열 장로 등 한국교회 관계자 4명이 북한 대외연락부 간부들과 만났다. 김 사무총장의 손에는 한기총이 모은 ‘사랑의 쌀’ 1만 가마니(800t)를 인천항에서 홍콩과 제3국을 거쳐 북한 남포항으로 보냈다는 선적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북측 인사들은 남포항에 쌀이 도착했음을 확인해주는 서류를 건네며 연신 ‘고맙수다’라며 인사했다.

그해 5월부터 도쿄 베이징 홍콩 등을 오가며 ‘007 작전’처럼 극비리에 진행한 작업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84년 북한적십자회가 남한에 보낸 수재물자에 보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로, 53년 휴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남한의 민간 물자가 북한으로 건너가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사자들은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5개월 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하면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한기총은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의 일환으로 이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쌀이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전달되겠느냐는 의심이 적잖았다. 당시 한기총 회장이었던 고 한경직 목사는 ‘그 쌀이 굶주린 북한 어린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되면 좋겠지만, 설사 그리 아니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보내자’며 실무진을 격려했다.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김경래 장로는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29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중에 홍콩 총영사가 우리한테 ‘그 건물에서 신상옥 최은희씨가 납치된 걸 알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데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갔느냐’고 했다”며 “사람을 믿고 한 일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전까지 민간 교류는 결코 쉽지 않았다. 89년 3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이던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방북한 뒤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될 정도로 남북간 분위기는 험악했다. 남북 교회 간 교류 역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제3국에서 만나는 수준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기총의 대북 인도적 쌀 지원은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북한 지원에 나서도록 하는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 재미교포 박세록 박사가 주축이 된 북미기독의료선교회(CAMM)가 북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함께 평양시 제3인민병원을 건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개된 ‘사랑의 의료품 나누기’ 운동도 대북 인도적 지원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국내외 크리스천들과 의료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제3인민병원은 95년 문을 열었다.

◇대북 지원 위해 북측 설득=한국교회가 인도적 지원에 나섰지만 북한은 선뜻 남측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 못했다. 95년 북한 대홍수는 역설적으로 북한의 심리적 저항선을 무장해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88∼98년 WCC 아시아담당국장으로 북한을 수차례 방문했던 박경서 전 유엔대사는 당시 “영양실조로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도 북한은 자존심 때문에 지원 요청을 꺼렸다”며 “구호단체 지원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며 북측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조그련은 WCC에 서신을 보내 홍수피해 복구사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북한 돕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96년부터 대북 인도적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북한에 들어간 지원물품이 민간인이 아니라 군부대나 공산당 간부 등 집권층에게 가고 있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박 전 대사는 “유엔과 함께 일하면서 북한 인사들에게 지원사업보고서를 쓰고 지출에 대해 영수증 처리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며 북한을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국제기구를 통해 모니터링 문제가 일정 부분 해소되면서 남측의 지원도 더 활기를 띠게 됐다. 특히 기독NGO들은 긴급구호 수준에서 벗어나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제옥수수재단은 북한과 함께 옥수수 종자 개량 사업을 펼쳤다. 월드비전은 2000년 평양에 씨감자 개발을 위한 온실을 설치하고 식량 자급을 도왔다. ‘대북지원사업의 대부’로 불렸던 고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은 생전 인터뷰 등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굶어죽을 때 도와줬다는 믿음을 줘야한다. 후대에 ‘정치적 상황이 힘든데도, 자기들이 빨갱이라고 오해받더라도 돕더라. 예수쟁이 말은 믿을 만하더라’는 것을 일화처럼 기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통일을 위한 투자다.”

◇남북 민간교류의 핵심으로=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기류가 급물살을 타면서 주요 교단들이 대북 교류와 지원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200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수차례 조그련과 만남 끝에 95년 문을 닫은 평양신학원 재개원을 돕기로 합의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신학원을 운영하고 목회자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남북 교회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2005년부터 북한 봉수교회 재건축을 지원해 2008년 헌당 예배를 드렸다. 칠골교회 재건도 도왔다. 이 과정에서 ‘북한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북한에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란과 비판이 거셌지만 남북 교회는 금강산과 평양 등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면서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이를 통해 남한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교회와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며 상호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통해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 민간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07년 4월 한국교회의 지원으로 문을 연 평양과학기술대학이 대표적이다. 평양과기대는 수시로 긴장과 대립 국면이 조성되는 남북관계의 특성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통일 이후까지 멀리 내다보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평양에 짓기로 한 ‘조용기 심장병원’도 남북 보건의료 교류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건설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지만 이영훈(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장병원 건축 재개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있다.

교계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교류가 정부의 대북지원과는 방법도, 효과도 다른 만큼 정부 정책과 별개로 지속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NCCK 화해통일국 노혜민 부장은 “남과 북이 오랫동안 갈라져 이념은 물론 삶의 간극도 크게 벌어졌다”며 “민간 차원의 활발한 교류가 밑바닥에서 진행될 때 통일의 큰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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