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한글회화 개척한 화가 금보성] “자음·모음 어우러진 회화로 세계미술시장 노크” 기사의 사진
한글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금보성 화가의 시선은 언제나 세계 미술시장에 맞춰져 있다.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진 회화로 전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김태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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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9돌이 되는 날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하다. 하지만 매년 한글날을 기리면서도 일상에서 그 소중함을 잊은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이뤄지는 한글 파괴는 심각할 정도다. 외계어에 가까운 왜곡으로 한글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30년간 한글의 예술적 조형미를 화폭 위에 그려내고 있는 화가가 있다. 주인공은 국내 최초의 한글화가로 불리는 금보성(49)씨다. 그는 80년대 중반 붓을 잡은 이후 오직 한글만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온 한글회화의 창시자다. 지난 1일 서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를 찾아 그의 한글 예찬론을 들어봤다. 그는 2년 전 서양화가 김흥수 미술관을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딴 아트센터를 개관했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고 한국인의 뿌리가 담긴 한국인의 정신입니다. 한글을 무기로 한 회화로 세계 미술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싶습니다." 지하 1층 작업실에는 그의 이런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자음과 모음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면서 만들어낸 대표작 '자화상' 시리즈, 캔버스에 퍼즐을 맞추듯 한국 전통의 오방색(청·적·황·백·흑)으로 덧입혀진 활자그림 등에서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국내 최초의 ‘한글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고등학교 때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한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것 같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는데 문뜩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쓰고 거기에 그림을 입히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것이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선교사로 해외 각지에서 15년간 생활했는데 그때 한글의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예술작품으로서 한글 문자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영어 알파벳 26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300여개에 불과한 것에 비해 한글은 24자로 1만1000여개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한’은 넓고 크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한글은 ‘큰 말과 큰 글’을 의미한다. 한글을 말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므로 우리 민족이 결국 큰 민족이라는 말과 같다. 한글로 그린 그림도 창조적이고 울림이 있을 수 있으며 세계적인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뛰어난 한글의 가치를 미술과 접목시켜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다. 한글이야말로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가장 뛰어나고 과학적인 유산이다.”



-한글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당시 반응은.

“‘한글은 직각의 미가 너무 두드러져 다양한 조형화 작업이 힘들다’ ‘상형문자인 한자와 달리 한글문자 자체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많았다. 그림을 전공하지도 않는 내가 한글회화를 한다는 것 자체도 당시에는 ‘웃음거리’였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64년 작품 ‘LOVE’를 많이 참고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단어 조각 하나는 뉴욕의 상징물로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미술 교과서에도 실리는 명작이 됐다. 우리 한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잘 활용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나의 작품 활동은 그에 대한 실천과정이다. 그림이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작품 활동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하나하나의 문자를 적절히 조합해 주제에 맞는 미적 요소들로 만들기까지 시행착오도 무수히 많이 겪었다. ‘한글은 예술이 될 수 없다’며 무조건 배척하는 분위기도 힘들었다. 초창기에는 작품이 팔리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그림이냐’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수많은 시도로 관절이 닳아 붓질이 어려운 때도 있었다.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선택한 한글에 대한 작가적 책임을 꼭 완수하고 싶었다. 우리의 정신이 담겨 있는 한글을 누군가는 예술 작품화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고 내 작품도 인정을 받고 있다. 정말 뿌듯하다. 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재 20여명의 한글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도 보람이라면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한글을 소재로 한 예술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한글을 작품화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한글을 소재로 지금까지 44회에 이르는 개인전을 열면서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전시회마다 ‘한글, 소리를 읽다’ ‘한글, 소리로 말하다’라는 식으로 주제를 정했다. 다음 달 전시회에는 ‘한글, 입체를 입다’라는 주제로 열 예정이다. 스티로폼을 사용해 적당한 크기로 절단한 후 한글 이름을 스케치하고 열선절단기로 기하학적 구조물을 만드는 그런 식의 작품들이다. 나의 초창기 작품은 주로 1차원적인 평면 문자의 영역이라면 지금은 3차원적인 공간 예술로 확장된 작품이 많다. 회화와 패션, 조형, 그리고 건축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글 이름을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른바 ‘성명학(姓名學)’ 회화다. 한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최종 바람의 목표를 결합해 예술로 조형화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이름을 작품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명 정치인, CEO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귀띔이다.)



-요즘 ‘한글 파괴’니 ‘한글 위기’니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한글은 ‘세계문자올림픽’에서 수차례 금메달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문자다. 하지만 한글은 세계적으로 보면 소수민족의 언어에 불과하다. 한글이 비록 우수하다고 하나 우리부터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한글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세계화 바람이 드세질수록 소수민족의 언어는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기 위해서는 부단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글을 알리기 위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지원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양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30년 작업 과정이 실험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실험을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색을 입히는 과정을 나는 ‘요리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튜브에서 바로 짜낸 물감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유한 색감을 얻기 위해 고심하며 배합한 물감을 사용하기 때문에 ‘반죽’이 아니라 ‘요리’다. 또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해서도 ‘식구(食口)’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요리’한 작품을 함께 향유하며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작품을 요리한 화가와 식구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한글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계획은.

“분단 70주년이다. 우리 민족의 반쪽 북한 주민들도 ‘큰 말과 큰 글’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 한글 전시를 해보고 싶다. 한글을 통해 작은 통일을 만드는 계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다. 한글은 조상들이 물려준 국가미래 산업의 동력이며 대한민국의 지문(指紋)이요, 정신이다. 생을 다하는 날까지 그것을 증명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화가 금보성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시인으로 등단해 7권의 시집까지 출간했다. 그림은 전공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예술 감각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한글 소재로만 44회의 개인전을 치렀고 참여한 아트 페어 및 그룹전도 50여회에 달한다. 중국 태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국제전에도 참가해 우리 문자를 세계에 알렸다. 1995년에는 신인 시인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각각 올해의 작가상과 올해의 인물 대상을, 2013년에는 대한민국문화예술인 대상을 수상했다. 해외에서도 2011년 독일 평론가 금상, 2012년 프랑스 작가상을 받았다. 형편이 어려운 화가나 신인 화가에게 자신의 아트센터를 무료로 빌려주고 홍보까지 대행해주고 있다. 그래서 금보성아트센터를 ‘창작의 짐을 짊어진 자유로운 영혼의 쉼터’라고 부른다.

만난 사람=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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