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명호] 호빗이 된 정치 지도자들 기사의 사진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은 키가 1m 정도인 유쾌한 성격의 난쟁이 종족이다. 영화는 2001년에 만들어졌는데, 2003년에 인도네시아의 외딴섬 플로레스에서 신체조건이 비슷한 초소형 인류의 화석이 발견됐다. 학계나 반지의 제왕 팬들은 열광했다. 나중에 학명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로 명명됐는데, 학계에서는 거의 공식적으로 호빗이라고 부른다.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호빗은 비교적 큰 키와 뇌를 가진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작게 진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된 이유를 전문가들은 섬 왜소화(矮小化) 현상으로 설명한다. 섬 왜소화란 진화 과정에서 동물이 작은 섬에 갇히면 크기가 놀랄 정도로 작아지는 것을 말한다. 시칠리아섬의 난쟁이 매머드, 뉴질랜드의 모아(타조보다 큰 새), 마다가스카르섬의 코끼리 새, 일부 작은 공룡 같은 종(種)들이 섬 왜소화 과정을 겪은 사례다. 공통점은 모두 멸종했다는 것이다.

갇힌 정치, 배타적 정치가 주류인 한국 정치는 섬 왜소화 현상이 진행 중이다. 정치가 작고 초라해졌다. 여권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언급함으로써 사실상 ‘유승민 찍어내기’를 실현시켰다. 그리고는 대구 행사에서 국회의원들을 배제시킴으로써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통령의 정치 관여는 당연하다. 그러나 콘크리트 지지층(일부는 맹목적 지지라고 표현한다)의 지역에서 이 언행의 의미를 모르는 유권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인물들이 그곳에 출마하리라고 보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여기에 유승민 의원이 “그럴 경우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얘기했으니 대통령의 언행은 TK 골목 안 싸움으로 전락해버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국민공천제는 명분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날 부정적 요소들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니 현역의원 내편 만들기 전략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결국 한국 정치 발전이라는 명제는 없어지고 골목 안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친박과의 공천 싸움이 돼 버렸다. 친박은 골목 안 기득권을 김 대표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파상 공세를 벌인다. 친박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은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목 좋은 중심지 골목 상권을 놓고 싸우는 꼴이다.

변두리 골목인 야당에서는 그나마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다. 친노와 호남은 서로를 여당보다 더 미운 대상으로 보는 듯하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혁신을 표방하지만 사실상 운동권 출신들에게 둘러싸여 10여년 장악한 짭짤한 이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미 바닥이 드러난 운동권 출신들은 내년 선거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후배들을 출마시키기 위해 대동단결했다. 호남권 중심의 신당 결성은 총선·대선에서 살아남기, 몸값 불리기 딱 그거다. 개인 기득권 유지를 위한 ‘최선의 수비=공격’ 전략을 착실히 실행 중이다.

골목 안 전쟁의 밑바닥에는 점점 강고해지는 지역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여권의 TK와 PK가 반목하고, 야권 내 호남은 더 뭉친다. 정치의 배타성은 더욱 강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덩치 큰 읍내 세력들이 경제와 안보를 무기로 골목 안을 위협하는데, 좁은 골목 안에서 자그마한 정치 이권과 알량한 기득권을 놓고 다투기만 한다.

섬 왜소화는 좁은 공간과 열악한 먹거리로 결국 동물을 멸종시킨다. 영화에서 호빗은 즐거운 중간계 생활로 돌아가는 해피엔딩이지만, 실제 외딴섬의 호빗(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은 이 별에서 사라졌다. 우리 정치는 갇혀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호빗이 돼버렸다.

김명호 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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