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아버지의 용서 기사의 사진
롯데에 다시 불이 붙었다. 동생의 완승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형제간의 싸움에 형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재가 된 줄 알았던 불씨가 서울 소공동 호텔롯데 34층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에서 산소를 흠뻑 머금고 화기를 내뿜고 있다. 지난 16일 언론에 공개된 신 총괄회장의 육성은 불티에 끼얹어진 기름이었다. “한국 풍습이나 일본도 그렇고, 장남이 하는 게 맞다”는 한마디는 다툼을 다시 발화시키기 충분했다.

역시 돈의 힘은 셌다. 망백(91세)을 지나 백수(99세)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서로 모시려는 롯데그룹 형제의 처절한 몸부림의 근원은 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영권 분쟁’이란 말로 포장하기엔 그들의 싸움은 전혀 그럴듯하지 않았다.

그룹을 차지하기 위한 재벌가의 골육상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분화 양식도 낯설지 않다. 형제들끼리 소송과 인신공격을 하며 피 터지는 싸움을 한다. 그렇지만 넘지 않는 선이 있다. 살아 있는 부친에 대한 주저함이다. 삼성을 동생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이맹희도 분함을 삭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자필 서명과 육성 녹음을 서로 활용하며 맞섰던 현대의 정몽구-몽헌 형제도 그것이 전부였다. 롯데는 인륜의 잣대를 넘나든다. ‘관계자’란 익명에 숨어 ‘건강이상’을 주장하는 측이나, ‘정상’ 판정을 받기 위해 부친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쪽 모두 일반적인 재벌 내분의 양상을 뛰어넘는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국민들 앞에서 ‘아버지는 치매다, 치매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과 마찬가지다. 20일에는 아버지 집무실 관할을 놓고 또 충돌했다. 볼썽사나운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 과정의 끝은 어디인가. 멈추지 않으면 아버지가 가야 할 곳은 뻔하다. 아들들은 결국 아버지를 법정 증인석에 세울 참인가. 형제는 급제동을 해야 한다.

롯데 앞에는 숙제가 많다. 당장 면세점 사업권 재연장 여부 결정이 올 연말이다. 정황상 비관적이다. 소상공인연합회는 19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롯데가 면세점에서 얻은 이익으로 그동안 골목상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반롯데 정서가 점점 퍼지는 마당에 재연장을 승인할 간 큰 공무원이 있을까. 연간 4조여원의 매출에 호텔롯데 전체 외형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면세점 수성에 실패하면 그룹의 순환출자 해소, 호텔롯데 상장 등 지배구조 개선이 물거품 될 가능성이 높다. 수만명의 고용도 불안해진다. 일각에서는 그룹 지배권을 차지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그만큼 면세점 사업은 롯데에 치명적이다. 형제가 시급히 여론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 이유다.

19세의 청년 신격호가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을 탔을 때 지닌 돈은 면 서기 두 달 치 월급이 전부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어려움에 ‘센징(조선인)’이란 멸시를 견뎌가며 오늘의 롯데를 일궜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자식들의 칼싸움이었다. 93년 인생의 회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들을 용서했다. 투자 실패의 책임을 물어 롯데홀딩스 회장에서 해임된 큰아들이 지난봄 석고대죄하자 용서했듯이, 작은아들에 대해서도 16일 “당연히 용서해야지”라고 언론 앞에서 공언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일이 크게 됐다”고까지 했다.

이제 아들들이 화답할 때다. 더 이상 추태가 계속된다면 서로의 상처가 너무 커진다. 이겨봤자 잃는 게 많다.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각각 지난 8월과 지난 8일 경영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민에게 진 빚은 이 정도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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