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신불산 억새바다 기사의 사진
영남 알프스 영축산 하늘억새길. 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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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가뭄 때문인지 추석을 훌쩍 넘기고도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을의 절정인 13일과 14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억새풀밭을 품고 있는 신불산과 영축산에 갔다. 경남 양산·밀양시와 경북 청도군, 울산 울주군에 걸쳐 있는 높이 1000m 이상의 7개 산군(山群)을 언제부턴가 ‘영남 알프스’로 부른다. 가지산(1241m) 간월산(1069) 신불산(1159) 영축산(1081) 천황산(1189) 재약산(1119) 고헌산(1034) 등이 그것들이다.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일 게다.

등억신리 주차장에서 신불산 억새평원을 겨냥한 산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초행길이다.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신불산의 탐방로 표지판이 부실해서 당초 거쳐 가려던 간월재와 간월샘을 놓치고 신불산 정상으로 직행했다. 그 덕분에 영남 알프스에서 가장 험하고도 조망이 좋다는 칼바위와 신불산 공룡능선을 가게 됐다.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자 암릉이 나타났다. 밧줄을 잡고서야 오르는 바위도 있다. 2시간 반가량 정신없이 땀흘리고 나니 왼쪽으로 평평한 능선과 억새밭이 보인다.

신불산의 사면은 양쪽이 절벽처럼 가파르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는 게 신기하다. 신불산 정상에서 영축산 정상까지 약 3㎞ 이어진 목재데크 탐방로는 멀리서 볼 때 억새바다 속 미풍에 출렁이는 은빛 물결 위를 건너는 낮은 구름다리 같다. 황금빛 들판에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억새꽃은 개체로서는 소박하면서도 집단적으로는 장엄하다. 성인 키보다 더 높게 자란 개체는 거의 없다. 억새는 주로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다년생 벼과 식물로 키가 1∼2m다. 바닷가나 강어귀에서 자라는 갈대는 키가 1∼3m로 1∼2m인 억새보다 더 커서 쉽게 구분된다.

영남 알프스 능선을 포함한 곳곳에서는 물이 나온다. 지리산 등 큰 산들이 몰려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은 사람들이 숨어 살기 좋은데 영남 알프스도 예외가 아니다. 근현대사의 굴곡마다 새겨진 집단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불산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간월재는 간월산으로 가는 능선의 안부(鞍部)인데 예전부터 울산, 울주와 밀양을 잇는 교통요지였다. 간월재는 울산에서 생산된 소금이 넘던 길이자 밀양 사람들이 언양장터로 넘어가던 고개다.

남쪽인 영축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축산까지 2.9㎞ 이어지는 억새밭은 점입가경이다. 영남 알프스 하늘억새길 4개 구간 중 가을에 가장 좋다는 1구간 억새바람길이다. 영축산 직전에 만난 ‘신불평원 단조성(丹鳥城)’ 안내판에는 “50만평의 드넓은 신불평원은 가을이면 억새나라가 된다. 억새가 춤추고, 바람은 떠밀고, 구름이 쫓는다”고 적혀 있다. 능선을 따라 단조산성 터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조성은 하늘이 감춘 땅이다. (…) 단조성을 지키는 보초병은 살기 위해 죽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억새 소총수이다. 아무리 짓밟고, 베고, 자르고, 뽑고, 태워도 다시 돋아나는 억새는 우리 민초들의 모습이다.”

울주군이라고 적힌 마대자루를 든 공익요원이 목재데크 옆으로 설치된 출입금지용 목책과 동아줄 너머로 쓰레기를 줍고 다닌다. 지나가는 탐방객들에게 갈대숲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질책한다. 그 탐방객들 말고도 여러 팀이 사진을 찍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울산광역시와 울주군의 계획대로 588억원을 들여 신불산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더 많은 인파가 지나다니게 되면 이곳에도 샛길이 하나둘 생길 것이다.

영축산 정상에 도달한 기쁨도 잠시. 통도사로 내려가는 표지판이 없다. 백운암을 거쳐 임도로 이어지는 가파른 하산로가 있다는데 갈림길에서 그쪽을 못 찾고 대신 더 험준한, 희미한 하산로를 내려가느라 고생했다.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낭떠러지에 세워놓은 통나무 사다리와 계속 이어지는 붉은 리본 덕분에 해지기 전에 통도사 근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이정표 용도의 리본들이 그토록 고마울 줄은 몰랐다.

산에 든다는 것은 사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국립공원은 탐방객 편리를 지나치게 배려한다. 탐방로 입구에 비데까지 갖춘 화장실이 있는가 하면,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도 목재·철제데크, 안내판, 안내시설 등을 설치해 놓았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표지판도 없거나, 엉터리인 군립공원도 문제지만, 과잉서비스의 국립공원도 문제다. 미국 국립공원의 경우 케이블카는커녕 차 다니는 비포장도로에 목책도, 가드레일도 없다. 초행인 큰 산에 들려거든 사전에 정보를 충분히 파악하고, 산행시간, 특히 하산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는 기본을 다시 떠올린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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