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다윗과 박정희의 역사 기사의 사진
양치기 아들 다윗이 왕이 됐다. 이스라엘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다.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민족의 선망의 대상으로 미화됐다. 그리고 메시야 사상과 직결되기에 이르렀다.

농사꾼 아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됐다. 대한민국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다. 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 국민의 선망의 대상으로 미화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박정희이즘’이 되어 신으로까지 추앙받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을 빼놓고 이스라엘 왕조시대를 말할 수 없다. 한국사에 있어 박정희를 다루지 않고 현대사를 말할 수 없다. 그만큼 두 사람은 역사를 움직이는 축이었다. 그들의 삶의 양상이 각기 그 국가의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되자 용병과 징병제를 강화했다. 다윗은 용병으로 지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다윗이 군부에 자기 세력을 구축하자 사울이 질투를 했다. 다윗이 혈족과 무법자, 즉 불만에 찬 계층을 지지 세력으로 사울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울에 쫓긴다.

일제 강점기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해방 후 박정희는 군부에서 좌익 남로당에 가입, 자기세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한 좌익계열 군인들이 여수·순천사건을 일으킨 과정에서 남로당원임이 발각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의 남로당 가입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의 왕 아기스의 수하에 들어가 사글락 성주(城主)가 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상황을 교묘히 빠져 나와 이스라엘의 숙적 아말렉을 쳐부수고 개선장군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반애국적 그의 과거는 은폐된다. 박정희는 만주군 선배 등의 구명운동으로 감형됐고 마침내 육군본부 비공식 무관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뛰어난 엘리트 군인이 되어 승승장구한다. 그의 과거는 엄호되거나 은폐됐다.

다윗은 개인사에 있어서 야욕과 욕망이 대단했다. 세력과 재력을 얻기 위해 아비가일과 정략적 결혼을 한다. ‘밧세바’ 스캔들(삼하 11장)은 그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때문에 악의 씨로 태어난 아들이 죽고, 자식들 사이에 치정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

박정희는 충북 옥천의 엘리트 여성 육영수와 결혼했다. 지도자 부부상의 모범이 되었으나 육영수가 괴한의 총탄에 사망한다. 권력자 주변에선 늘 루머가 따랐다. 그리고 박정희는 1979년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부하 손에 죽는 불운을 맞는다.

두 사람은 각기 40년과 18년을 통치했다. 다윗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을 왕권국가로 만들었다. 영토가 유브라데강까지 확장됐고 군사,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됐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이끌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산업화로 돌파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희생이 따랐으나 개발도상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빚어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적어도 유신체제로 가기 전까지 그는 강직한 지도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영도력을 인정한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영도력을 인정한다. 두 사람은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후대는 그들을 뛰어난 지도자로 꼽는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경우 학술적으로 ‘쿠데타’이나 정서적으로 ‘혁명’이라는 인식이 그를 겪은 국민 사이에 강하다.

문제는 후대의 평가다. 성서의 기자는 다윗의 치부를 주저 없이 폭로한다. 성서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관점의 역사 서술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권력의 몫이 아니다. 역사가의 몫이다. 성서도 재해석되는 마당에 역사의 재해석을 ‘한 가지 생각’으로 차단하는 것은 죄악이다. 역사 재해석을 통해 자기들의 전통을 형성하고 발전시킨 공동체가 민족인 것이다. 전정희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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