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대구는 왜 보수의 상징이 됐나 기사의 사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다. 여름휴가 때 고향 대구에서 친구 두 명과 저녁을 먹었다. 대화거리는 정치로 옮겨갔고 자주 그렇듯 노통을 ‘씹는 것’으로 이어졌다. 지역 정서를 아는 터라 평소 잠자코 있는데 그날은 정도가 심해 물었다. “도대체 노통이 왜 그렇게 싫은 거야.” 한 친구는 단박에 “말이 많아서”라고 대답했다. 다른 친구는 뜸을 들이더니 “그냥 싫다”는 것이었다. 명색 지역의 여론 주도층인 친구들이 진보 성향의 노무현에 대해 갖는 반감 이유가 ‘겨우 이 정도였나’ 싶어 한심했지만 보수의 속살이거니라고 받아들였다. 새삼 10여년 전을 언급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구의 보수성은 강고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때 대구는 저항과 진보의 도시였다. 1946년 ‘대구 10·1사건’, 60년 ‘2·28학생의거’, 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 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해방 정국 당시 조직률 90%의 경북교원노조는 전국교사 운동의 실질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진보 트라우마라는 원인(遠因)과 기득권 향유라는 근인(近因)이 대구를 보수의 중심으로 바꿨다.

대구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국민보도연맹’ ‘대구 10·1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등의 후유증이 이곳의 진보 토양을 아주 옅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자주 말한다. 특히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수천명이 체포된 ‘대구 10·1사건’은 시민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마저 갖게 했다는 것이다. 좌익이 가세한 시위에 유혈 진압이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시민 상당수가 직간접적 피해를 보게 됨으로써 이념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선고 다음 날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돼 세상을 경악시켰던 인혁당재건위 사건 피해자의 다수가 대구 출신이었던 사실도 이 지역 진보역량을 크게 위축시킨 요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 이르기까지 대구 진보진영의 영향력은 서울과 광주·전남 등 타 지역에 비해 크게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정권은 영호남 차별 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사하면서 대구 사람들을 중용했다. 이런 양상은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1명의 대통령 중 5명(전두환 대통령 포함)이 이른바 TK(대구·경북) 출신이 되면서 심화됐다. 중앙 무대에 진출한 인사들이 끈끈한 고리를 형성하고 세력화되면서 대구는 정치권력의 본산이 됐다. 채찍에 혼나고, 당근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구의 이데올로기는 오직 보수만이 득세했다.

대구의 보수성은 선거 때마다 지역 유권자들의 결집력과 선거 결정력으로 구체화됐다. 주목되는 것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공고해지는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대구 득표율은 80.1%였다. 직전인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얻은 69.4%를 훨씬 뛰어넘는 것은 물론 역대 대선 후보 중 최고였다. 그해 총선 역시 대구의 12석 모두 새누리당이 휩쓸었다. 박 대통령이 상당한 여론의 반대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정치를 하는 것은 이 같은 콘크리트 지지층의 강한 신뢰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구의 보수성이 한국 정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점이다. 시대가 변하면 이념적 관점보다는 민생 이슈가 정치판을 달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대구의 정치지형은 여전히 이념, 그것도 보수 일변도의 틀에 갇혀 있다. 감히 단언컨대 대구 유권자들은 내년 총선에서도 ‘배신의 정치’로 내쳐진 자리에 새로 들어선 ‘진실된 사람’을 맞이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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