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터키의 축구팬은  왜 파리의 비극에  야유를 보냈을까 기사의 사진
정건희 기자
반성의 말부터 꺼내야겠다. 수많은 죽음에 대해 무감각을 조장한 책임은 일정 부분 언론에 있다. 한 해 수만명에 달하는 테러 희생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얘기되는 죽음’과 ‘얘기 안 되는 죽음’을 직업적으로 구분했다. 파리 테러는 물론 무척 ‘얘기되는 죽음’이었다.

17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열린 터키와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 경기에 앞서 파리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이 거행됐다. 일부 터키 축구팬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를 보내고,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해프닝은 전 세계로 타전돼 최악의 매너라는 빈축 속에 십자포화를 맞았다.

“고인들을 위한 1분의 침묵도 참지 못하느냐”며 “(야유한 관중이) 터키 전체는 아니다”라고 비판한 파티흐 테림 터키 감독처럼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우리 언론도 유사한 비판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간 터키의 아픔을 ‘얘기 안 되는 죽음’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죄책감으로 그들을 위한 변명을 조금 해보고자 한다.

이슬람국가(IS)가 노리는 것은 난민 위기와 IS 척결을 위해 뭉치고 있는 국제적 공감대의 분열이다. 그만큼 터키 축구팬들의 소요는 분명 IS의 의도에 부합하는 행위였다. 최소한의 인류애라는 관점에서도 제국의 후예다운 ‘대인배’스러움은 없었다.

그럼에도 ‘남의 목숨은 제 발에 난 티눈만 못하다’ 했던가. 터키인들이 파리 테러를 바라보는 감상은 우리보단 좀 더 복잡 미묘한 측면이 있다. 당장 지난달 앙카라역 광장에서는 100명 이상이 IS의 테러에 희생됐다. 그들은 난민 경로의 한가운데에서 수시로 테러 참사와 위협에 직면해 왔다. 죽음과 무관심을 일상으로 겪어왔기에 파리를 향한 ‘유별한’ 애도 물결이 마냥 곱게만 보이진 않았을 수도 있겠다.

비단 이 같은 상대적 소외감은 터키만의 것이 아니다. 파리 테러 직전인 12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는 IS 자살폭탄 테러로 250여명이 사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곧 이은 파리 테러로 베이루트는 세계인의 이목에서 멀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베이루트 역시 끔찍한 공격을 받았으나, 잊혀졌다”고 썼다. 레바논의 의사 엘리 페어레즈는 블로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었을 때 세계는 그들을 애도하지 않았다. 국제적인 뉴스 주기에 비춰볼 때 그저 관련성 없는 한 점일 뿐”이라며 자조했다.

국제 싱크탱크인 경제평화연구소(IEP)가 발표한 ‘글로벌 테러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테러조직은 IS가 아니라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이다. 나이지리아에서만 6000명 넘게 희생됐다. 거의 매주 수십명 이상이 보코하람의 테러로 사망하고 있지만 관심 밖이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나의 비극이 누군가의 불행으로 위로되지도 않는다. 상징성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서 유독 파리 테러에 집중된 추모 물결이 조금은 씁쓸하다. 더 자주, 더 많은 테러와 학살에 시달리고 있는 중동·아프리카의 아픔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했던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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