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인걸과 절개 품어준 지리산 기사의 사진
지리산 둘레길 행정마을 개서어나무 군락. 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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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언제나 그 안에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산이다. 이곳의 늦가을 벽돌색 단풍과 단감 철은 이제야 절정이다. 지난 12일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둘레길 운봉∼인월 구간을 걸었다. 이날 숲길 걷기에는 김영문 전북대 법과전문대학원 교수가 동행했다. 김 교수는 안식년인 2012년 12월부터 1년여 지리산과 산자락 마을에서 살았다. 그가 남원시 산내면 달궁마을 근처 동떨어진 집에 처음 둥지를 틀었을 때에는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TV도, 인터넷도 없이 살다 보니 주말만 되면 서울이나 전주로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절대고독 속에서 한동안 몸부림치고 나면 몸은 자연스레 책상 앞으로 향했고, 그 시절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벽소령 깊은 산 속 움막에서도 3개월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지리산 속 어디에선가 세상과 소식을 끊고 사는 사람이 1만5000명가량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물론 확인할 수 없는 수치다. 하지만 지리산의 역사와 인문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67년 이후 지금까지가 지리산 역사상 가장 적은 규모의 사람들이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지리산은 물이 풍부해서 산 속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남한 내 거의 유일한 산이다. 그래서 한반도 역사의 굴곡마다 지리산은 은둔이나 도피, 그리고 항쟁과 의거의 터전이었다.

운봉읍 행정리의 마을숲은 언뜻 보아 주변 풍경과 동떨어져 있다. 수령이 100년을 훌쩍 넘었을 아름드리 개서어나무 90여 그루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 논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숲의 규모는 작지만 안에 들어서니 여름에는 햇빛을 온통 가리는 천연 에어컨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 입구의 안내판에 따르면 행정마을 주민들이 약 180년 전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라고 한다. 행정마을 자체가 사방이 확 트여 겨울이면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곤 했는데 비보림이 이런 바람과 하천 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비가 내린 13일 산청군 남사예담촌 안에 있는 이호신 화백의 한옥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활동해 왔던 화백은 2010년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지금까지 지리산과 그 자락 마을을 자신만의 ‘생활 산수화’에 담고 있다. “풍경은 부분이고 산수는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요즘 스마트폰과 디지털카메라에 많이 의존하지만, 편하면 안 된다. 거기에 사색을 덧붙여야 작품이 나온다.” 이 화백이 30여년간의 배낭여행과 숱한 스케치 답사를 통해 체득한 진리다.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자취를 쫓아 산천재로 발길을 돌렸다. 조선시대에도 숱한 유학자들이 3∼25일에 걸쳐 두류산(지리산의 옛 이름)을 오르고 그 기록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영 교수에 따르면 기록을 남긴 22명의 지리산 여행자 가운데 조식, 남효온을 비롯한 13명은 일생 동안 관직과 거리를 둔 선비, 즉 처사들이었다.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지리산 유산기(遊山記) 중 단연 백미에 해당된다. 조식은 지리산 유람을 통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시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지금의 시대를 통찰하려 했다.

깊은 통찰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조식은 1555년 조정으로부터 단성현감 자리를 제안받자 이를 고사하고 임금에게 재야인사로서의 고언을 담은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곧 을묘사직상소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臣)이 낮에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하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식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상소문 때문에 잘 알려진 대로 국왕의 진노를 사 진짜 죽을 뻔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당시 임금과 고관들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왜병과 맞서 피 흘리며 싸운 의병대의 지도자 혹은 조력자의 상당수는 조식의 제자였다.

흔히 말하듯 역사가 가르치는 가장 큰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나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정 교과서 강행 등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 운영과 헌법 무시 행위에 대해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비구름에 가린 천왕봉 앞에서 남명 선생이 느꼈을 비분강개와 대쪽같은 절개를 떠올리며 오늘 이 무기력감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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