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인 <7> 한국엔 소개 안된 인간재활학 박사 뒤늦게 도전

현지서 언어 지도 ‘미국 아버지’ 덕분… 영어실력 부족한데도 전과목 A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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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 부족한 영어를 세심하게 지도해 주고 리포트도 체크해 준 미국 기드온협회장 딕네스씨(왼쪽). 김종인 교수는 그를 ‘미국 아버지’ 라고 불렀다.
말리 홀트 여사는 자신이 안식년을 맞아 지난 1년간 미국 노던콜로라도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며 나에게 이 대학서 공부해볼 것을 권했다.

“재활과 특수교육 두 가지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미스터 김도 공부하면 어때요. 내가 입학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아줄게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한 나는 일단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미국 휠체어면허증을 취득할 때 내 성적이 우수했던 것을 기억해 추천한 것 같았다. 사실 내 영어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녀는 한국을 위해 국내엔 아직 소개된 적이 없는 ‘인간재활학’(Human Rehabilitation)을 공부해 보라고 재차 권했다.

용기를 냈다. 박사 학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말리의 추천은 강력했고 토플시험 없이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1993년 1월 4일, 37세의 때늦은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인간재활을 전공하는 새로운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이다.

눈 덮인 록키산이 있는 콜로라도에서 첫 여장을 푼 곳이 송요준 장로님 댁이었다. 송 장로는 내가 공부할 노던콜로라도대학 메디칼센터 의사이자 교수였다. 학교에 가니 지도교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박사과정은 토플성적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막막했다.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절대 절명이었다.

송 장로님께 이 문제를 상담하니 그릴리의 기드온협회장 딕네스씨를 소개해 주었다. 난 이분을 ‘미국 아버지’(America Dad)라 부르며 영어를 지도받기 시작했다.

“주님. 제게 영어 방언을 허락해 주세요. 지혜를 주셔서 토플 점수가 제대로 나와 한국으로 돌아가는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무렵 내가 매일 외쳤던 절규이자 기도였다. 난 경상도 사나이라 안 되는 발음이 많았다. ‘L’ ‘R’ 자 구분이 안 되고 ‘쌀’ 과 ‘살’ 발음도 잘 되지 않았다. 딕네스씨는 원래 미국 대학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를 받고 월남전에도 참여한 분으로 아주 고급영어를 구사했다. 이 분의 영어 지도는 내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켜 주었다. 내가 작성한 리포트는 어김없이 딕네스씨의 검증을 거쳐 제출했는데 신기하게도 언제나 A학점이 나왔다.

죽어라 공부한 토플시험에서 537점을 받아 일단 조건부 박사과정 학생이 되었다. 당시 입학 자격은 550점이었다.

송 장로님은 내가 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졸업하고 나오는 날까지 한인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매주 신앙지도를 해주셨다. 고비마다 하나님은 기도를 요구하고 또 필요한 분들을 붙여주셨다. 로리 카트만 여사는 인자한 미국 할머니다. 로리는 학과 행정실 담당 직원으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적당히 부를 이름이 없어 ‘맘(Mom)’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후 정말 어머니 같이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도와 주셨다.

교수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내가 졸업 논문심사 날짜를 받은 뒤 장소와 발표내용을 상의하자 완벽하게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내게 20달러만 달라고 해 케익과 꽃, 심지어 향수까지 뿌려놓는 멋진 심사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박사과정 졸업까지 2년 9개월 간 90학점을 올 A로 이수하고 졸업하는 영예를 선물로 주셨다. 재활학 박사과정 68학점과 노인학 22학점을 추가로 취득해 노인전문가 자격증까지 받은 것이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많은 학점을 딴 경우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의 한국인 최초 인간재활학 박사 학위는 그 첫 문을 말리 홀트 여사가 열었지만 이후 여러 명의 천사들이 협력하고 응원해 만든 기적의 열매였다.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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