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조문정국의 민낯과 YS 유훈 기사의 사진
# 상도동 사람들

벌써 20년 넘게 흘렀다. 문민정부 출범 후 김영삼(YS) 대통령을 탄생시킨 ‘상도동 사단’의 형성 과정에 관한 스토리를 취재하기 위해 특별팀 일원으로 현장을 뛰어다녔던 일이. 당시 본보는 일간지 중 처음으로 그들의 정치역정과 이면사를 추적한 대하 기획 시리즈 ‘김영삼의 사람들’을 1994년 2월에 선보이며 매주 한 차례 장기간 연재했다. 69년 YS의 ‘40대 기수론’에서 출발한 연재물은 2년 뒤 책(전 3권)으로도 엮여 나왔다.

‘좌(左)동영 우(右)형우’로 일컬어진 YS 인맥 태동기의 핵심은 다름 아닌 유석 조병옥 박사의 아들 조윤형이었다(이하 존칭 생략). 훗날 갈라서긴 했지만 초창기에 함께한 유일한 현역 의원으로 YS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 조윤형은 신라호텔에서 가진 수차례의 시리즈 인터뷰에서 생생한 증언과 함께 숱한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애주가답게 항상 양주를 들면서. 돌쇠 최형우, 조직의 귀재 서석재, 분신(分身) 김덕룡 등 가신 1세대를 비롯한 수많은 상도동 사람들은 물론 김대중(DJ)의 동교동계 인사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숨어 있던 정치 비화도 복원했다.

YS가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DJ에게 패배한 뒤 집에 있던 침대를 부숴버린 일, 최형우가 70년대 초반 모호한 정치적 태도를 보인 YS에게 “그 따위 식으로 하면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안돼”라고 소리 지르며 술상을 엎어버린 ‘회현동 술집사건’ 등은 감초 같은 에피소드였다.

# YS의 적자(嫡子)라는데…

‘김영삼의 사람들’을 회고하는 까닭은 조문 정국에서 나온 ‘적자’ 논쟁 때문이다. 상도동계 출신의 새누리당 김무성과 서청원이 “정치적 아들”이라며 각자 상주를 자임하며 벌인 빈소정치가 유치하다. 두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YS 적통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둘은 85년 2월 12대 총선 신당 돌풍에 이어 YS·DJ가 전면 해금된 직후 상도동 진영에 합류한 이들이다. 김무성은 사업을 하다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85년 4월 제2기 민주화추진협의회 체제 때 들어왔고, 서청원은 관제야당 민한당이 붕괴된 85년 5월 신민당으로 적을 옮겨 민주산악회 동작지부를 맡으며 상도동계가 됐다. YS가 반독재 투쟁을 한 엄혹한 유신시대와 80년대 초반 암흑시대가 아닌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때였다는 말이다. 적자라는 주장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87년 6·29선언 때까지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지금 시점에서 적자 노릇을 하려면 적어도 YS의 정신을 계승해야 맞는 법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친박’ ‘비박’ 정파 이익에 매몰돼 권력자에게 충성 경쟁만 하고 있는 것을 YS는 뭐라고 할까. 낯이 뜨겁지 않은가.

# 소통·포용의 리더십은 언제쯤

거인을 떠나보내며 우리 정치권의 리더십 부재를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YS는 소통과 포용의 정치를 보여주고 ‘통합과 화합’의 유훈을 남겼다. 그러나 현실정치는 정반대다. 권력 정점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부터 바뀌어야 하지만 전혀 변화가 없다.

국가장 기간임에도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까지 주재하면서 국회를 겨냥해 “맨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고” “위선” “국민에 대한 도전”이라며 적대감을 격렬하게 표출했다. 배신을 심판하고 진실한 사람을 선택하라며 분열의 정치를 조장한 데 이어 유신시대의 거수기로 보듯 입법부를 하대하며 대결의 정치를 천명한 꼴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의 리더십이다.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국민은 적대시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계파별 내분으로 무기력증에 빠진 새정치민주연합도 내세울 건 없다.

이제 조문 정국이 끝남에 따라 정치권은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잠시 휴전했던 여야의 정쟁은 재연되고 진영논리에 갇혀 반목할 게 뻔하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한 고인의 통 큰 정치가 아쉬울 따름이다. 참으로 답답한 세상이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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