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국인에 묻다] ‘흙수저 인생’인데 ‘노오오오∼력’하면 된다고?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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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창업자 김정훈(가명·27)씨의 꿈은 이민이었다. “이 나라를 뜨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다가 “정말 해 보자”고 목표를 세웠다. 10년 안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 위해 종잣돈 2억원을 모으기로 했다. 취업 이민을 위해 일식·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경기도 일산에서 혼자 작은 배달 식당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하지만 김씨가 ‘간과’한 게 있었다. 매일 살아야 하는 녹록잖은 현실을 그는 제대로 계산해내지 못했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 1000여만원, 23㎡ 조금 넘는 가게 월세 40만원, 가게보다 작은 원룸 월세 40만원, 마트 계산원을 하는 홀어머니에게 보내는 생활비 20만∼30만원, 재료비, 차비, 각종 공공요금, 세금….

월 매출은 150만∼250만원 정도.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아끼고 아껴서 살면 매달 50만원 정도 적금을 부을 수 있다. 형편이 지금보다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면 10년 일해야 6000만원을 모은다. 일을 더하면 영어공부할 시간이 없다. 일만 해서 운 좋게 2억원을 모은다 해도 영어를 못 하면 이민이 힘들어진다.

김씨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2억원이면 제대로 된 식당 차려서 여유롭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잊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2억원 모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없는 사람은 탈출도 못하게 막는 게 ‘헬조선’이다”고 토로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는 21세기다. 그런데 가장 희망찬 시절을 보내야 할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조선, 그것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지옥(헬·Hell)과도 같은 계급국가라는 표현이다. 2010년 즈음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쓰이던 인터넷 용어가 어느새 10∼30대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 됐다. ‘헬조선’을 얘기할 때 자주 따라다니는 4가지 키워드를 통해 ‘헬조선’ 현상을 좀 더 깊게 들여다봤다.



‘수저계급론’과 ‘노오오오력’

계층 간 격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차이가 더 커지고 더 견고해진다는 데 있다.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자수성가한 부자가 없는 나라가 됐다. 올해 포브스 조사 결과 미국 억만장자 75%는 자수성가형 부자였고, 우리나라는 75%가 상속자들이었다.

‘수저계급론’은 희망 없는 사회에 대한 방증이다. 이민을 꿈꾸는 김씨의 계급은 ‘흙수저’다. 살면서 한 번도 셋방살이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는 한 번도 정규직이 돼 보지 못했다. 재산보다 빚이 많다. 20대 김씨마저 언제 망할지 모르는 자영업자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김씨는 늘 가난했다고 한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난은 놀림거리거나 비난 대상”이라며 “지금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는 관심 없으면서 ‘남 탓 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하라’고 쥐어박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대가 되면서 믿지 않는 말이 생겼다. ‘노력하면 된다.’ 그는 “앞이 안 보이는데 대통령까지 나서서 ‘노오오오력’ 하라고만 한다. 하지만 난 더 ‘노오오오력’ 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민모(29)씨는 지난해 지방의 한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부모님은 교사이고, 경기도 신도시에서 오래 살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울 것 없이 자랐다. ‘흙수저’들이 부러워할 만한 ‘은수저’지만 그는 열등감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대학시절 민씨는 서울 강남에 사는 친구들이 해외로 영어 연수를 다녀오거나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걸 보면서 자신이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부모 돈으로 스펙을 쌓을 때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원비를 벌었고 비슷한 형편의 친구들과 스터디를 했다.

그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계획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려고 취업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취업문을 통과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면서 “부모가 가진 돈이 많을수록 자식이 받게 될 월급이 많아지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의 ‘금수저’ 친구들 스펙을 물었다. 한마디로 대답했다. “아이비리그요.” 해외 유명 대학 또는 대학원 졸업장 정도는 있어야 최상위 레벨에 진입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N포세대’의 ‘열정페이’

헬조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늘어나 ‘N포세대’라고 불린다.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저녁이 있는 삶, 여가, 꿈, 희망….

그렇게 포기하고도 얻을 수 있는 건 ‘열정페이’인 경우가 많다. 류모(22·여)씨는 대학부터 포기했다. 서울 상위권 대학에 들어갈 수능 점수가 안 나왔다. 대신 그는 헤어디자이너를 꿈꿨다. 유명 미용실 체인점에 스태프로 들어가서 희망을 가져 봤다. 매일 12시간씩 서서 일을 하고, 독한 제품들을 맨손으로 만지다보니 습진으로 피부가 벗겨지고 얼룩덜룩해졌다.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고 받는 돈은 월 80만원 정도다.

류씨는 “밤늦게 일이 끝나고, 일 끝나면 실습해야 해서 친구들도 잘 못 만난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 끝까지 해볼 생각이지만 내 미래가 ‘헤어디자이너’가 아니라 ‘미용업 자영업자’가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김씨가 순수입 100만원 안팎의 배달식당을 차린 것도 ‘열정페이’에 질려서다.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할 당시 김씨는 일식당에서 일했다. 꼬박 10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손은 불에 데거나 칼에 베이기 일쑤였다. 너무 피곤해서 공부도 잘 안됐다. 그러고 월 120만원을 받았다.

김씨는 이민 목표를 세우면서 ‘가족’을 계획에 넣지 못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싶지만 현실을 보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포기하는 게 편하다고 결론지었다. 김씨는 인터뷰 도중 수차례 이렇게 말했다. “제 얘기가 기사거리가 되나요? 요즘 다 저처럼 사는 것 아니에요?”

김씨의 질문은 박창호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의 지적과 맞닿아 있다. 박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기성세대가 ‘헬조선’을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며 “심각한 청년 실업, 계층 간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문제를 정부, 정치권, 기성세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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