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철 칼럼] 물갈이 공천 필요하지만 기사의 사진
원로 정객한테서 들은 얘기다. 5공 정권 출범 직후인 1980년대 초 일본 중의원 의장단이 방한해 정래혁 의장을 비롯한 우리 국회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일본 측 인사들이 정 의장과 운영위원장인 이종찬 민정당 원내총무의 나이와 선수(選數)를 꼬치꼬치 물어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50대 중반으로 불과 3선인 정 의장과 40대 중반 초선인 이 총무의 짧은 정치이력을 얕잡아본다는 느낌이 역력했다고 한다.

얕잡힐 만도 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을 제정해 1402명의 정치인 발목을 묶어버렸다. 정치를 쇄신한다는 취지였지만 현역의원 물갈이가 사실상 초헌법적으로 이뤄졌다. 81년 3월 실시된 11대 총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신군부에 협조하는 사람만 출마할 수 있었으니 우리 헌정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일본 의회 지도자들이 우리네 꼭두각시 정치인들을 대놓고 무시했지만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와는 확연히 다른 성격이지만 현역의원 물갈이는 이후 총선 때마다 큰 관심사였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 불신이 상존하기 때문에 정치개혁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물갈이 공천은 매력적인 선거 전략이다. 내년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도 물갈이 공천이 여야 정당의 공통 관심사로 부각돼 여의도가 뒤숭숭하다. 박근혜-김무성 신경전과 문재인-안철수 갈등의 기저에는 물갈이 공천이 자리 잡고 있다. 공천 과정에서 자기 사람을 많이 심으려고 나름 안간힘을 쏟는 형국이다.

물갈이 공천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비리 혐의로 검·경 수사를 받거나 막말을 일삼는 함량 미달 의원은 자연스럽게 퇴출시킬 수 있다. 대통령의 잘못된 언행에 ‘아니올시다’라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여당 중진 의원, 부정한 방법으로 자녀 취업 청탁하는 의원, 실력보다 영호남 지역바람에 연명하는 의원도 공천에서 배제하면 다시 당선되기 어렵다.

하지만 물갈이 공천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19대 총선 때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물갈이 공천을 한 결과 현재 초선 의원이 의석정수의 절반인 150명이나 된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5선 이상은 13명(7선 1명, 6선 3명, 5선 9명)에 불과하다. 물갈이한 덕에 지금 국회가 잘 돌아가고 있는가. 정치개혁은 이뤄졌는가. 나는 서슴없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국회와 당 지도부에 속하는 의원들은 의정활동 경력이 짧아서인 듯 협상 능력이 수준 이하다. 연부역강한 초선 의원이 많은데도 잘못된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헌정사상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이번에도 물갈이 공천이 필요하겠지만 과거와 같은 마녀사냥식 밀어내기는 피하는 게 좋겠다. 단지 나이가 많거나 선수가 높다는 이유로 불출마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능력 있으면 평생 한들 어떤가.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을 개혁, 혹은 쇄신이라고들 하지만 또 하나의 정치 포퓰리즘인지도 모른다. 의회민주주의가 만개한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 재선 비율이 90% 이상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존 코니어스(86)와 찰스 랭글(85) 하원의원은 무려 25선과 23선이다.

국회 원 구성을 감안하더라도 초선이 절반인 지금보다는 3, 4선이 주축인 항아리형 구조가 훨씬 바람직하다. 안정적 국회 운영을 위해서는 원로그룹도 일정 수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5선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은퇴하지 않고 한 번 더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나쁘지 않다. 100세 시대를 살면서 국회의장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60대에 줄줄이 여의도를 떠나는 것은 좋은 관행이 아니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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