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국인에 묻다] 44세 김 차장 ‘저녁 없는 삶’… 가정도 없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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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인 김모(44)씨에게도 어엿한 이름과 가족이 있다. 하지만 김 차장 또는 김 차장님으로 더 자주 불린다. 여보나 아빠로 불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숙련된 조교처럼 아침을 맞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샤워를 하고,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삼킨다. 아이들이 깰까 봐 조심하며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 터벅터벅 걸어 출근길 지하철에 오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다. 그렇게 김 차장의 하루가 펼쳐진다.

전반전 - 늘 미소 띤 얼굴로… 고객 눈치도 봐야 하고
09 : 00
김 차장은 ‘9시에 출근해서 좋겠다’는 고객의 농담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전 9시에 은행 셔터문이 올라간다고 은행원들이 그 시간에 ‘땡’하고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영업을 시작하기 1시간 전에는 나와야 그날 업무를 차질 없이 준비할 수 있다. 출근해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각종 서류와 통장, 카드를 주섬주섬 챙긴다.

은행도 예전의 은행이 아니듯 업무도 많이 달라졌다. 예금을 받고, 돈을 빌려주는 건 일부일 뿐이다. 펀드, 연금, 방카슈랑스, 각종 외환상품까지 수백개에 이르는 상품이 거래되는데 이를 꿰뚫고 있어야 일이 돌아간다. 금융 당국의 정책이라도 바뀌면 다시 익혀야 한다. 새로운 상품이나 정책에 대해 교육받느라 1주일에 사흘 정도는 출근을 한 시간 더 빨리 해야 한다. 가끔은 교육 자료 준비가 그의 몫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은행 문이 열리면 고객들이 밀려온다. 미소로 맞아야 한다. 김 차장은 입으로는 상품을 설명하면서 눈으로 고객의 눈치를 살핀다.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이 감지되면 여지없다. 은행 홈페이지 고객센터에 불평불만을 담은 게시물이 남겨진다. 본사 고객관리부에서는 이를 직원 평가에 반영한다. 이러다 보니 고객이 ‘서류를 못 챙겨왔으니 봐 달라’ 떼를 써도 ‘안 된다’고 답해선 안 된다.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객님’ 하고 상냥하고 완곡한 어법을 구사해야 한다.

하프타임 - 손님 기다릴까 점심도 5명씩 3교대로
11 : 30
어느새 점심때다. 회사규정상 점심시간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이다. 이 정도면 오찬을 즐겨도 남을 시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식사시간이라고 해서 고객을 은행에 앉혀두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김 차장이 근무하는 지점은 고객 편의를 위해 5명씩 3교대로 점심을 먹는다. 두 시간을 세 마디로 쪼개고 나니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식사시간은 고작 40분에 불과하다. 은행 문을 나서 식당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허겁지겁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빠듯하다. 한 식탁에 동료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지만 오가는 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씹고 삼키는 시간도 부족한데 대화는 사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말없이 밥공기에 머리를 파묻는다.

식사 뒤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꿈꿀 수 없다. 점심시간은 짬을 내 업무를 보려는 직장인들로 창구가 붐비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김 차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40분을 다 쓰지 못하고 창구에 앉는다. 서둘러 식사를 한 터라 속이 조금 쓰리다. 그래도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

후반전 칼퇴근 언감생심… 셔터문 내리고 또 잔업
16 : 00
은행이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해서 한낮에 바로 퇴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경제부 장관은 지난 10월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구상에 오후 4시면 문을 닫는 금융회사가 어디 있느냐”고 일갈했다. 은행에서 일하는 김 차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대부분 은행원이 ‘칼퇴근’하는 줄 아나 보다.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소리다. 은행 문을 닫고 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다시 시작된다”고 반박했다. 이어 “외국도 얼추 오후 4시면 은행 문을 닫는다. 일본 은행은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고 덧붙였다.

셔터문을 내리고 나서가 본격적인 ‘전쟁’이다. 입출금 숫자를 맞추는 건 기본이다. 조금이라도 숫자가 어긋나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고객을 응대하면서 쌓인 수백장의 서류를 일일이 정리하고 분류해야 한다. 월·분기·반기별 전략도 짜야 한다.

당시 최 부총리는 “입사하고서 10년 후에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한국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라고도 했다. 김 차장은 “우간다 사정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업무 부담이 늘어난다. 은행권 연봉이 많다는 지적은 납득하겠지만 정말 일 안 하는 사람이 많을까 반문하게 된다”고 했다.

김 차장은 입사 뒤 크고 작은 감원을 수차례 겪었다. 명예퇴직으로 떠난 직원들의 빈자리는 남은 직원들이 십시일반 메워야 했다. 퇴근 시간은 자연스레 늦어질 수밖에 없다.

연장전 업무 실적 채우려면 주말에도 고객관리
20 : 00
업무를 마무리하고서도 은행원의 하루는 끝이 나지 않는다. 고객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맞춰 문자를 보낼 시간이다. 주말에는 ‘날씨는 쌀쌀하지만 마음은 훈훈하게. 행복이 가득한 주말 보내세요’라고 문자를 보낸다. 고객이 퇴근할 쯤에 맞춰 전화도 건다. 전화를 받은 고객들이 썩 달가워하지 않더라도 고객을 관리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김 차장은 올해 승급 심사에서 이미 한 번 누락됐다. 팀장이 되고 지점장이 되려면 성과를 내야만 한다. 그러려면 남들보다 더 일해야 한다. 성과를 내려는 게 꼭 승진 때문만은 아니다. 김 차장이 다니는 은행에선 지점별로 성과를 매겨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 평가에 따라 성과급이 많게는 1년에 1000만원씩 차이가 난다.

지점별로 혹은 팀별로 채워야 할 실적은 숫자로 나타난다. 김 차장의 하루는 몇 개의 숫자로 평가받는다. 실적이 저조하면 팀장은 물론이고 동료 눈치도 살필 수밖에 없다. 월말에 실적 평가를 하기 때문에 실적을 채우지 못한 달에는 스트레스가 심해진다. 가족과 지인을 동원해서도 실적을 채우기 힘들 때면 어디 숨을 데라도 찾고 싶다.

인저리타임 - 밤 10시 넘어서야 은행서 집으로
22 : 00
밤 10시가 넘어서면 은행을 나선다. 출근길을 되돌아 집으로 간다. 집에 오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자고 있다. 아내도 보통은 침대에 누워있다. 아빠나 여보라고 부르며 반기는 걸 바라는 것조차 미안하다. 김 차장은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에 2285시간 일한다는데 누가 그렇게 적게 일하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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