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명호] 생계형 정치자영업자들 기사의 사진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게다. 1980, 90년대에 정치인들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가십 기사가 정치면이나 동정면에 가끔 났던 시절이 있었다. 입원했다고 슬쩍 흘리면서 써달라는 식의 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기사는 꽤나 읽힌다. 써달라는 것도 그런 정도의 취지로 이해했었다. 그게 다가 아닌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입원 사실이 퍼지면 ‘관계자’들은 병문안을 간다. ‘가야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갔다가 그냥 나올 수 없다. 편지봉투에 ‘쾌유(快癒)’ 또는 ‘미성(微誠)’이라고 쓴 것을 놓고 나온다. 정치인들이 ‘관계자’를 오라고 한 적도 없다. 단지 동정 한 줄만 신문에 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갈 사람은 다들 알아서 간다. 봉투를 지참하고.

국회의원들의 집안 경사나 애사는 결과적으로 모금 기회로 활용되기도 했다. 게다가 그동안 회계처리 못했던 검은 자금을 슬쩍 축의금·부의금에 끼워 넣는다. 한강에 배가 지나간 것과 같다. 국회의원이 들려준 ‘비법’이니 적지 않게 사용됐겠다. 요즘은 아예 받지 않는 정치인들이 많으니 옛날얘기다. 지난 국정감사 즈음에 새누리당 소속 상임위원장을 만났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반기 위원장을 맡았는데 주위에서 한 1억원은 손해봤다고 놀리더라. 출판기념회로 모금 좀 할 수 있었는데, 지금 분위기로는 엄두도 못 내니….” ‘의원회관에 신용카드 단말기 설치해 시집 판매’, 처음 들었을 때 참신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이렇게까지 진화했구나. 저런 창조적인 생각으로 법을 만들고, 정책을 펼치면 얼마나 잘할까.

예전 야당 의원들은 도덕성을 무기로 독재 정권을, 여당 의원들을 상대했다. 국민도 그런 점을 인정해주면서 자그마한 실수는 오히려 감싸주는 분위기도 있었다. 민주화 신념과 도덕적 우위, 여권 견제심리, 동정심, 이런 것들이 여론을 형성해 야권을 지탱시킨 힘이 됐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원칙으로 책임 윤리와 신념 윤리를 들었다. 두 윤리가 최적 상태로 조합이 되는 게 좋겠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그게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굳이 따지면 베버는 책임 윤리를 좀더 강조했다. 정치는 ‘어떤 신념·목적을 추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포괄하는 것’으로 봤다. 현실 정치 영역에서 신념의 문제는 ‘지극히 재난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운동권 패권주의가 장악한 야당에 책임 윤리는 실종됐고 왜곡된 신념 윤리만이 판을 치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은 정의를 위하는 올바른 신념이 있으니 단말기 설치해 시집을 팔아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니 ‘흙수저’들의 분노에도 로스쿨 아들 졸업 청탁을 하고, 지역구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딸을 취직시켜도 되는 것이다. 왜곡된 신념으로 무장된 정치 자영업자들이 극단적으로 연출해낸 것이 ‘통진당 부정 경선’이라는 막장 드라마였다. 여당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게다. 국회라는 철벽 안에서 예산을 이리저리 나눠먹고, 관련 기관에 ‘갑질’하는 구조 말이다. 단말기 사건의 첫 변명이 “다른 데도 그렇게 했다는데…”에서 보이듯 운이 없어 걸렸을 따름이다.

생계형 정치 자영업자가 늘어나는 구조 속에는 무책임과 무능력이 횡행한다. 그리고 진정한 책임·신념 윤리 없이 각자도생(各自圖生) 원칙만 존재한다. 유권자들의 분노는 이제 임계점에 다다랐다. 눈을 부릅뜨고 자기 지역의 후보들을 살펴봐야 한다. 생계형 정치 자영업자들을 걸러내는 것은 결국 투표밖에 없다. 그렇게 못하면 정치는 초라하고 천박하게 굴러간다. 정치 수준은 유권자 수준 딱 그거다.

김명호 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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