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5> 서울∼수원 약품 배달 고된 알바하며 신학대 마쳐

4학년 때 시골교회 담임목사 맡아 고학생 시절 기른 뚝심·인내심 도움

[역경의 열매] 김진호 <5> 서울∼수원 약품 배달 고된 알바하며 신학대 마쳐 기사의 사진
1966년 12월 28일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열린 김진호 목사와 송복순 사모의 결혼식.
감리교신학대 재학 시절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는 날이 반복됐다. 학교에 다니고 밥을 사먹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었다. 매일 나는 경기도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을 했다. 통학시간이 너무 길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독특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서울 종로5가에 있는 대형 약국들에서 약품을 받아 수원에 있는 약국에 배달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약품을 포함해 대부분 제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서울 약국에는 있는데 지방엔 없는 ‘진귀한’ 약품이 많았다.

약품을 배달하는 일은 수원과 서울을 매일 오가야 하는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한 선물 같은 일자리였다. 이렇게 ‘약장사’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학비와 용돈을 벌 수 있었다.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수원에는 내가 담당하는 단골 약국도 여러 곳 생겼다. 당시 종로5가에 있는 보령약국에서 주로 미제(美製) 약품을 구해 배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이 고되다 보니 학업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 수업시간에는 자주 꾸벅꾸벅 졸았다. 장학금을 받은 적도 없다. 그렇다고 낙제점을 받았던 건 아니다. 언제나 B학점 정도는 나왔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대학시절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수업시간에 매일 자던 친구가 나중에 감리교단 감독회장까지 됐다”며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0대 때부터 계속된 고학의 시절이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뚝심과 인내심이다. 나처럼 고학생으로 한 시절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목회를 하다가 시련을 만날 때면 항상 힘들고 배고팠던 내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1962년 군에 입대해 1년6개월간 복무했다. 당시에는 대학생의 군 복무기간이 짧았다. 군에서 전역하니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64년 경기도 군포 둔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신학대 4학년 학생이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게 지금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는 목회자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나 같은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둔대교회는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시골교회였다. 교인은 30명 정도였다. 처음 강대상에 올랐을 때 느낀 감흥을 잊을 수 없다. 6·25전쟁으로 항상 배고팠던 시절 교회에 가면 떡을 준다는 이야기에 교회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느낀 따뜻한 사랑, 고교 시절 수련회에서 성령을 체험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일…. 하나님을 섬기기로 다짐한 뒤 겪었던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교인들은 나를 주님의 ‘어린 종’이라고 부르곤 했다. 돌이켜보면 목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교인들은 미숙한 나를 무시하기보다는 항상 품어주고 보듬어줬다. 둔대교회 교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운 생각부터 든다.

둔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며 품은 초심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이 강했다.

65년 대학을 졸업한 뒤 친척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성장한 6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1년간 연애를 했고 66년 12월 28일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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