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국립수목원의 붉은 열매들 기사의 사진
국립수목원에서 만난 붉은 겨울 열매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덜꿩나무 산수유 줄무늬낙상홍 백당나무 가막살나무 청미래덩굴. 포천=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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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나무에선 꽃도, 잎도, 열매도 거의 다 떨어지고 없는 계절이 왔다. 지난 16일 찾은 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에는 탐방객을 보기 어려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도 있겠지만, 꽃이나 단풍에 열광하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이 절기에 숲을 찾는 발길은 뜸할 수밖에 없다.

국립수목원은 세조가 묻힌 광릉의 부속림(광릉숲) 한자락에 조성돼 있다. 광릉숲은 조선왕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전란과 사람 손을 피해 간 덕분에 200∼300년 된 고목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광릉숲은 자생식물종이 983종, 동물서식종이 2826종, 천연기념물은 20종에 이르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다. 그 덕에 2010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특히 장수하늘소, 광릉요강꽃, 미선나무, 섬개야광나무 등 숱한 멸종위기종들이 잘 보호되고 있다. 국립수목원 연구기획팀 오승환 임업연구관과 김성식 전문위원이 탐방을 함께했다. 오 연구관은 “탐방객이 가장 적은 시기이고, 일부 열매 빼고는 볼 것이 별로 없을 텐데…”라고 걱정했다.

일반인은 물론 어지간한 야생화나 나무 애호가들도 식물을 꽃 위주로 관찰한다. 그래서 꽃이 지고 나면 종을 식별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 해당한다. 식물 입장에서는 남의 생식기에만 열광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엽기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니 가을철 씨앗을 퍼뜨린 후 긴 겨울 동안 눈(芽)을 만들고, 그것을 틔워 이른 봄에 꽃과 잎을 돋아낼 준비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평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관목(키 작은 나무)원에는 과연 아직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있다. 낙상홍, 산수유, 가막살나무, 괴불나무, 백당나무, 덜꿩나무, 작살나무, 팥배나무 등이다. 다른 열매들 다 사라져 새들이 배고파질 때까지 기다려 뒤늦게 열매의 수분을 빼고 당도를 높이는 지공(遲攻·지각공격)파들이다. 특히 원예용 (미국)낙상홍은 멀리서 보면 단풍이 활활 타오르는 듯 많은 열매를 포도송이처럼 달고 있다. 가막살나무의 빨간 열매는 폭죽 터지듯 옆으로 퍼져 있다. 덜꿩나무 열매는 수분이 빠져서 작아졌지만, 그래도 붉은 윤기를 잃지 않고 있다. 괴불나무는 두개씩 마주 보며 달려 있는 열매 모양이 개불알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당나무 열매는 석류알처럼 뭉쳐 있다.

각양각색의 열매마다 거의 임자가 따로 있다. 김성식 전문위원이 설명했다. “주황색 팥배나무 열매의 씨앗은 되새 떼나 멧새가 주로 먹는다. 산수유는 직박구리가 좋아하고, 몸집이 작은 오목눈이와 박새들은 아그배나무와 낙상홍의 작고 빨간 열매, 그리고 작살나무의 앙증맞은 보라색 열매를 즐긴다.” 그래서 공원에 나무를 심거나 아파트 조경을 할 때 울음소리나 자태가 예쁜 새들을 초대하려면 그에 알맞은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새들도 알고 보면 미식가다. 작지만 당도가 높은 고욤나무(감나무 원종) 열매는 새들이 다 먹고 없고, 감나무의 큰 열매는 아직 남아 있다. 이 시절 관목원이 각양각색의 열매 뷔페가 차려진 새들의 낙원일 줄은 몰랐다.

봄을 맨 먼저 알리는 나무들의 겨울눈을 살펴본다. 딱총나무와 귀룽나무는 꽃이 4월 말이나 5월에 피지만 잎은 빨리 나므로 늦겨울에 가장 먼저 잎눈을 틔운다. 히어리, 풍년화, 생강나무, 올괴불나무, 길마가지나무 등은 일찌감치 꽃눈을 만든다. 이들 키 작은 나무는 큰 나무들이 잎을 내고 나면 햇빛을 잘 못 받아 생장·번식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들의 잎이 나기 전을 노린다. 이른 봄 긴 꼬리 모양의 꽃을 주렁주렁 매다는 서어나무와 까치박달도 일찍 눈을 터뜨린다.

나무인문학자인 강판권 박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나무를 꽃의 상대말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특별시의 상징나무 은행나무와 상징꽃 개나리가 사실은 모두 나무인데 “시목과 시화를 나눈 기준은 다분히 꽃의 화려함”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즉 각 지자체가 시목으로 설정한 나무들은 꽃이 화려하지 않거나 관찰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 어떤 나무든 꽃을 피워야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식물의 1주기, 즉 라이프사이클을 계절별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어느 한 숲길을 정해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식물들을 관찰해보는 게 좋다. 나는 올해 안산자락길을 자주 다니면서 늘 궁금해하던 한 나무가 여름철 독한 향기를 내뿜는 누리장나무라는 것을 꽃을 보고서야 알았다. 또 가을 늦게까지 빨간 꽃받침 속에 짙푸른 열매를 품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식물의 한해살이 과정은 다른 동식물들과 경쟁하기도,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는 복잡한 그물망이 펼치는 드라마다. 그런 관계 맺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동식물과 생태계를 깊이 이해하는 첩경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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