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신앙 선조들 독립운동 현장서 통일코리아 소명 깨달아”

특별기획 시리즈 대장정을 마치며-한국교회 헌신 역사의 현장 뛴 취재기자 방담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신앙 선조들 독립운동 현장서 통일코리아 소명 깨달아”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국민일보는 지난 3월 2일부터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시리즈를 총 4부 42회 보도했다. 10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통해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감당해온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짚고 내일의 과제를 모색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의 후원으로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네덜란드 독일 등 해외 6개국도 현장 취재했다. 특별기획 취재에 참여했던 종교국 기자들은 23일 방담을 갖고 믿음의 선조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취재하면서 느낀 점과 평화통일이 왜 한국교회의 소명인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박지훈=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러시아 연해주 편 취재를 담당했다. 연해주를 출발점으로 삼은 건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지가 항일운동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고려인이 대거 살고 있는 곳도 역시 연해주다. 그곳에서 뿌리를 잃어버린 고려인을 만난 일은 가슴 아팠다. 한 고려인 2세 할머니는 우리말을 거의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건 부모가 ‘경주 최씨’라는 것뿐이었다. 고려인 4세나 5세에게 한국은 조상들의 고국일 뿐, 자신과 관련 없는 나라였다. 우리가 그간 이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절감했다.

◇백상현=상동교회 청년회장 출신인 이준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평양 산정현교회 4대 목사였던 강규찬 목사의 삶에서 볼 수 있듯 한국교회와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일례로 1919년 장로교 총회록을 보면 3·1운동으로 인한 장로교회의 피해상황이 나온다. 3·1운동 후 3개월간 사망 31명, 복역 976명, 태형 928명, 중상자 116명 등이었다. 재판에 회부된 이는 총 2386명이었다.

◇강주화=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신문물에 눈뜨고 복음을 받아들인 크리스천 지식인들은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갑신정변이 실패했는데도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행함으로써 개화사상을 퍼트리고 3·1운동 후 독립운동을 지원한 서재필의 행적은 놀라웠다. 크리스천들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부름에 적극 응답했다. 김구는 무장 항일독립운동, 안창호는 교육입국을 통한 자립,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했다. 각각 다른 방식이지만 나름의 한계와 장점이 있었다.

◇김아영=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일본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 역시 크리스천 청년들이었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는데, 이 중 김상덕 송계백 윤창석 백관수 김도연 서춘 등 6명이 크리스천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심장부였던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나라를 잃은 절망이 깊던 당시 어떤 힘으로 이들이 적지에서 감히 독립선언을 했을까. 복음으로 자존감을 회복한 이들은 어두운 상황에 낙담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민족의 소망을 갖게 됐을 것이다. 개인의 영달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비전을 키웠던 그들의 헌신 덕분에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에 헌신했던 신앙선조들이 잊혀져가고 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아 아쉬움을 줬다.

◇박=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 곳곳을 방문했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강, 항일운동의 대부로 통했던 최재형 선생이 총살당한 장소 등을 탐방했다. 하지만 애국지사가 순국한 장소에 기념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안타까웠다.

◇백=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은 복음과 민족이라는 두 기둥을 붙들고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그 후대는 이런 역사적 과업을 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않고 사회구원의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반민족세력’이라는 오해를 뒤집어쓰고 반기독교 여론에 직면해 있다. 반성이 필요하다.

◇이용상=한국전쟁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맞섰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가 파악한 순교자 245명의 73%인 181명이 이때 숨을 거뒀을 정도다. 그들의 죽음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분단과 전쟁이 겨레에 남긴 상흔은 깊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쉼 없이 개인 구원과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고 북한인권 운동을 전개하며 탈북자들을 도왔다.

◇이사야=해방 후 월남한 기독교인들에 힘입어 남한에선 교회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특히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기독교인으로 1945년 12월 시작한 베다니전도교회는 피난민의 만남의 장소이자 해방 후 혼란기에 기도의 처소로서 역할을 했다. 6·25한국전쟁 발발 후 영락교회 교인들은 피난지에서 교회를 설립했고, 개인 구원과 사회 개혁에 힘썼다. 이후 민족복음화에 목표를 둔 전도활동과 북한선교를 오늘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유영대=한국교회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탈북자를 대한민국으로 인도하는 ‘쉰들러 프로젝트’ 사역이 대표적이다. 한국교회는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넘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탈북자를 구출했다. 남한에 온 탈북민 2만 8000여명 중 절반 이상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야=한국교회는 통일한국에 대비해 탈북민의 정착을 돕고.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는 대북사역 등에 힘쓰고 있다. 이제는 통일 후의 사역을 준비해야 할 때다. 분열과 다툼에서 벗어나 통일 후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고민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선 한국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김나래=한국교회는 앞장서서 북한과 만나고 끊임없이 대화해왔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연달아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등 북한 교회와 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신상목=동·서독 교회는 통일 이전부터 적극 교류해왔다. 주목할 대목은 동·서독교회의 교류에 이데올로기적 장벽은 없었다는 것이다. 서독교회는 무제한 동독을 지원했고, 동독교회는 동독 정부에 맞서 평화기도회와 시위를 감행하며 통일을 견인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통일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이념의 장벽에 갇혀있는 것 같다. 남북 대립 구도에 따라 교회의 반응도 달라지곤 한다. 교회가 통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남북의 정치적 현실과 이념적 장벽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다면 교회는 남북한 교류를 막는 모든 정치적 장벽을 걷어내라고 정부에 요구할 것이다.

◇김나래=남북 관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돌발 변수에 부딪힐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행진을 멈출 수 없다. 힘들더라도 한 걸음씩 발걸음을 떼야 한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화해의 제자도’,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신=한국교회에는 무엇보다 지속적인 기도운동이 필요하다. 성대한 기념식이나 행사가 아니라 작은 실천이 더 중요하다. 쥬빌리 기도회와 통일광장기도회 등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부족하다. 모든 교회가 통일의 기도 횃불을 올려야 한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목록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