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김나래] 복 있는 사람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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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9일 주일 새벽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양병원과 보훈병원 응급실을 오가셨지만, 진짜 그렇게 훌쩍 가실 줄 몰랐다. 유언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외할머니 이름은 오유복이다. 이름이 참 아이러니하다. 세속적으로 복 있는 삶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결혼 3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 외할머니는 엄마와 유복자인 외삼촌을 키우느라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나마 애지중지 키운 외삼촌은 오랜 투병 끝에 40대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고 묻고 쓰는 직업을 가졌지만 할머니에겐 “그 고된 삶을 어떻게 버텼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돌아가신 후에야 더듬더듬 답을 찾아보고 있다.

외가는 감북동에 있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경기도 하남시로 넘어가는 경계 부근이다. 서울 생활권이지만 밀양 박씨 집성촌이 있어 마을 공동체 성격이 강했다.

할머니에겐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시집와서 ‘누구 댁’으로 시작해 ‘누구 엄마’, 그리고 ‘누구 할머니’로 이름을 바꾸어 달며 50년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상의 작은 수다를 나눴고, 함께 여행도 다녀왔다. 누가 아프거나 다쳐서 생기는 빈틈은 서로 메웠다. 장례나 결혼 같은 큰일도 같이 치렀다.

그 친구분들은 젊었을 적 외할머니의 별명이 ‘오도바이’라고 기억했다. 성격이 급한 만큼 행동도 빨랐던 외할머니는 동네에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고 한다. 손도 크셔서 명절 때면 늘 음식을 넉넉하게 해 놓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

마을엔 교회가 있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의 감북동교회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무렵, 교회는 유치원을 열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외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엄마와 외삼촌을 유치원에 보냈다. 교회는 교육뿐 아니라 아픈 주민이 있으면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하는 등 의료 지원도 열심히 했다.

외할머니가 교회를 다닌 건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외할머니가 어떤 극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됐는지도 여쭤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외할머니는 항상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분으로 기억할 뿐이다.

외할머니는 그 교회를 평생 다녔다. 목사님이 심방가자고 하면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지고 병원 신세를 자주 지면서 교회에 가기 어려울 때도 주일예배는 꼭 드리고 싶어 했다. 감북동교회 김문희 목사는 “교회에 오는 걸 너무 좋아하셨고, 늘 ‘목사님∼’ 하고는 제 손을 권사님 얼굴에 갖다대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이 선하다”고 회고했다.

장례를 치르면서 외할머니에게 미처 던지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외할머니에겐 고달픈 삶의 여정을 함께할 이웃이 있었고 평생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외할머니의 가는 길을 함께하며 그 삶을 기억하고, 추억을 나눈 것도 교인과 마을 사람들이었다.

만약 마을과 교회가 없었다면 외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분명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꾸로 여전히 그런 마을과 교회가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적어도 최근 뉴스에 등장한 20대 언어치료사의 고독사, 인천에서 친부에게 학대받다 탈출한 11세 소녀 사건 등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요즘 서울시를 필두로 지방자치단체마다 ‘마을 공동체’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소통하며 각자 삶의 문제를 나누고 함께 해결하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마을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살았던 마을은 집성촌이라는 특수성을 토대로 ‘마을’로서 제 기능을 했다. 하지만 당장 급한 일이 생겨도 아이를 옆집에, 같은 아파트 단지 사람에게 선뜻 맡기지 못하는 나에겐, 안타깝게도 그런 마을 공동체가 아직 없는 셈이다.

교회는 또 어떤가. 지역사회에서 ‘신앙의 공동체’ 역할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많은 교인이 마음 둘 교회를 못 찾고 쇼핑하듯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며 떠돌고 있다. 아마 앞으로 평생 한 교회를 섬기는 일은 갈수록 보기 드문 사건이 될지 모른다.

외할머니를 보내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아침, 다시 생각해본다. 외할머니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픔 많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고, 한평생 마을에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더불어 사는 삶의 정수를 맛보고 가셨다. 외할머니는, 복 있는 사람이었다.

김나래 종교부 차장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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