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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하형록 <5> 여전한 가난과 인종차별에 힘들었던 미국 생활

초등학교 졸업 앞두고 필라델피아로 아버지 택시 운전·청소로 가계 꾸려

[역경의 열매] 하형록  <5>  여전한 가난과 인종차별에 힘들었던 미국 생활 기사의 사진
부산에서 보낸 시절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는 하형록 회장(왼쪽 두 번째)의 어릴 적 모습. 온 가족이 힘을 모아 교회 인근에 있는 밭을 일구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두어 달 앞둔 1969년 12월, 우리 가족은 무사히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당시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우리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계셨다. 미국은 매우 크고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막상 와 보니 내가 살던 부산보다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집들이 단층집인 데다 번화한 거리도 없이 시골처럼 조용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가난한 신학생이다 보니 사는 형편도 한국에서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책상도 없었다. 전축도 라디오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무척 실망했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산에 살 때는 아버지는 목회자였고 돼지와 닭을 키우던 한센병 환자들 덕분에 고기와 달걀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오니 아버지는 그저 가난한 신학생에 불과한 데다 네 명의 아이가 딸린 가장으로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해야 했다. 낮에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수 보조를 하고 밤이면 야간 청소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때는 밤새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가정부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봉제공장에서 바느질을 했다.

내가 아버지를 잘 이해하게 된 것은 함께 일을 나가면서부터다.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큰 빌딩을 청소하러 다녔다. 아버지 혼자 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하기 때문에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화장실 청소만큼은 나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에도 두세 군데씩 다니며 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 그 많은 고생을 묵묵히 감당했다.

아버지가 심야 택시를 할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택시 기사라는 사람이 길도 모르는 데다 승객이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저 뒤에 앉은 손님이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데 보다 못한 승객들이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면 꾹 참고 다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곧 길을 익혀서 나중엔 팁 받는 재미에 날 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동양인이 별로 없어서 한국에서 온 신학생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팁을 더 챙겨주곤 했다. 가난한 우리 형편으로선 그 팁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도 식당에 가든, 호텔에 가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팁을 많이 주라고 당부하셨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형과 나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우리가 미국에 가기 1년 전인 68년에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흑백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당시 인구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동양인에 대한 핍박도 심했다. 당연히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놀림을 받는 데다 수업 시간에는 영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맘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특히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하’라고 부르지 않고 ‘하하하’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문둥이’라고 놀림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한 것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한센병 환자촌에서 보낸 시간이 미국 생활의 어려움을 잘 넘기는 약이 되었던 것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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