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아티스트 팬클럽 기사의 사진
돈을 주고 그림을 산다는 건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주제에 월급을 헐어서 옷도 아니고, 휴대폰도 아니고, 그림에 질렀던 그 일은 2011년 5월에 있었다. 이태원 뒷골목의 갤러리 ‘골목’에서 장수지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나의 첫 전시회’란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미대를 갓 졸업한 젊은 화가인데, 뿔이 달린 여자를 주로 그렸다. 동물이 자신을 보호하려 뿔을 달고 있듯이 성숙하지 못해 불안한 소녀의 심리를 뿔에 담아 표현한 거라고 했다.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둘러보다 ‘그래도 뿔은 좀 아니다’ 싶어서 유일하게 뿔이 없는 그림을, 그것도 33×22㎝ 가장 작은 그림을 골랐다. “뿔이 없어 좋네요” 대신 “색감이 마음에 드네요” 하며 미술에 무지함을 은폐하고, “큰 그림은 비싸네요” 대신 “집에 걸려면 이게 좋겠어요” 하며 주머니 사정을 감추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구입한 작품 ‘소녀’는 지금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이 작은 사치는 ‘그래, 나도 그림 사는 사람이야’ 하는 우쭐함을 잠시 주더니,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활의 일부가 됐다.

내 생애 첫 그림 쇼핑이 생애 첫 개인전 화가의 작품이 된 것은 정지연(39·여)씨가 보내준 전시회 초대장 때문이었다. 그를 인터뷰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정씨는 ‘아티스트 팬클럽’이란 인터넷 카페를 운영했다. 팬클럽이란 말처럼 무명의 젊은 미술가를 ‘응원’하는 일을 했다. 갤러리와 신예작가의 갑을관계에서 영원한 ‘을’일 수밖에 없는, 갤러리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기에 작품 운반비부터 도록 촬영비까지 직접 부담해야 하는 이들에게 전시회 좀 열어주자며 뛰어다녔다.

그가 2010년 처음 기획한 전시회 타이틀은 ‘반짝쑈’였다. 보통 전시회는 1주일 이상 하는데 이건 딱 2시간30분 동안 열렸다. 구로동 구로아트밸리에 26만원을 내고 장소를 빌려 신예작가 10명의 작품을 걸었다. 작가들이 자기 그림 앞에서 관람객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뭘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 수다를 떨었다. 20만원짜리 소품 2점이 팔린 1회 반짝쑈를 발판으로 정씨는 아예 전시회 열어주는 회사 ‘에이컴퍼니(A Company)’를 차렸다. 장수지 작가가 문외한인 나를 구매자로 만난 것은 에이컴퍼니가 기획한 첫 개인전에서였다.

이 회사는 지난 11일 창립 5주년을 맞았다. 어엿한 사회적기업이 됐다. 지난해 9월 ‘브리즈 아트페어’란 전시회를 열었는데, 인사동도 청담동도 아닌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열린 전시회에 2000명이 다녀갔다. 대부분 유료 관객이었다. 신예작가 60명의 작품이 걸렸고 85점이 판매됐다. 구매자 중 24명은 5년 전 나처럼 생애 처음 그림을 산 이들이다.

IT 업체 휴맥스는 지난해 분당 사옥에 갤러리 ‘휴맥스 아트룸’을 조성하며 에이컴퍼니에 전시와 운영을 맡겼다. 나유림 허승희 등 신예작가의 개인전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서울 이화동에는 에이컴퍼니가 직영하는 ‘미나리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갤러리 겸 카페, 그리고 작가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된다.

전시 공간이 없어서 가방 매장 한켠을 빌려 그림을 걸고, 카페 메뉴판 뒷면에 그림을 넣자고 뛰어다니던 정씨가 5년 동안 만들어온 것은 무명작가를 위한 ‘기회’였다. 미술계의 ‘제도권’에 발을 들이지 못한 이들도 이 정도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공평한 것 아니냐며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다. 그만큼 기회에 목마른 이가 많았다는 뜻이다. 지금 청년들이 ‘헬조선’을 말하는 것도 기회를 달라는 외침일 테다.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정씨가 보여준 듯하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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