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박창균] 채무 노예 없는 사회를 위해 기사의 사진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새로운 노예가 발생하는 중요한 경로 중 하나가 채무불이행이었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사람의 인신을 지배하고 노동을 강제해 빌려준 돈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가 채권자에게 보장됐던 것이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인데 요샛말로 해석하자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물론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노예제는 오래전에 종말을 고했고 채무불이행에 대한 처분도 채권자의 권리 확보라는 일방적인 관점에서 후퇴해 채무자 상황을 고려해 양자 간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점차 이행해 왔다. 그렇다고 힘의 균형이 바뀐 것은 아니다. 채권자는 성실하게 상환 의무에 임하지 않는 채무자를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채권 상환을 독촉할 수 있는 추심의 권리는 여전히 채무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채무의 성실한 상환을 독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채무자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압박은 채무자가 도덕적 해이를 저지를 유인을 축소해 신용질서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채권 추심은 양날의 칼과도 같은 것이다.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 채무자의 경제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가정파탄의 원인이 됨은 물론 인권침해 문제로까지 비화할 개연성이 언제든지 존재한다.

이러한 우려에 대응해 대부분 국가에서는 채권 추심의 방법과 강도에 대해 규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산 선고를 받고 법원 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대되는 점을 물어보면 채권 추심 안 받아도 된다는 사실을 드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추심은 채무자들에게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채권 추심 관련 제도가 개선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영역이 바로 개인 부실채권이 거래되는 시장이다. 금융회사는 회수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부실채권을 상각하고 정상 채권과 별도로 관리하다가 크게 할인된 가격으로 매각해 일부라도 회수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자산관리회사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가진 회사가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추가적인 채권 추심을 통해 채권을 회수하고 남은 부분은 다른 자산관리회사에 매각한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거치다 보면 십수 년을 훌쩍 넘어서는 부실채권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물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채권 추심의 고통을 십년 넘게 자청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파산 선고를 통해 갚을 수 없는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지만 3000만원 이하 소액 채무자의 경우 이마저도 마땅치 않다. 이 정도 소액 채무의 경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원이 파산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멸시효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간단한 절차만으로도 소멸시효를 연장할 수 있어서다.

소액 장기 채무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도덕적 해이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70세가 넘어서도 자식들 도움을 받아 죽기 전까지 갚겠다고, 또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도 한 달에 2만원씩이라도 갚아서 채무를 벗어나겠다고 신용회복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아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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