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지현]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 기사의 사진
“아빠의 딸로서 그리고 아들로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해서, 좋아하시는 술 한잔 함께 마셔드리지 못해서, 먼저 안아드리지 못해서, 사랑한다 말하지 못해서, 그리고 아빠라는 그 이름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보라에게 존경하는 아빠, 덕선에게 친구 같은 아빠, 그리고 노을에겐 든든한 아빠가 되어주었기에 그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최근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응팔)에서 명예퇴직을 한 아빠에게 덕선이 감사패를 낭독하는 장면이다. 26년간 성실하게 다닌 은행에서 갑자기 명퇴를 당한 가장을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시절의 명퇴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금융권에서 5만여명이 명퇴를 했다. 경기 후퇴로 이런 위기감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실직이나 사업실패 등의 위기를 만나면 대부분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 왔는데 이것밖에 안 되는가’라는 좌절감에 빠진다. 많은 이들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고 말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가족이다.

대부분 가장들이 실직 사실을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지 못하는 이유는 ‘못난 남편으로 보일까봐’ ‘아내에게까지 고민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응팔’에서도 누구보다 남편을 이해하는 부인 일화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아빠 이제 은행에서 졸업했다”는 표현으로 아빠의 퇴직을 알렸다. 명퇴나 잘렸다는 단어가 아닌 ‘졸업’이라는 표현을 통해 남편의 길고 힘든 시간을 위로하는 그만의 방식이 보기 좋았다. 감사패 하나 없이 진행된 퇴임식에 서운했던 자녀들이 만들어 준 감사패 역시 가장에게 분명 위로가 됐을 것이다.

만일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가장이 위기를 만났을 때 가족들은 감정의 수위를 맞추어야 한다. 특히 남편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해 있는지, 얼마나 강박적인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아내가 이해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남편을 평가하는 가치기준도 바꾸어야 한다. 즉 지위나 수입으로 남편을 인정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 자체를 격려하자. 특히 40, 50대 가장은 자기 가치기준을 공동체의 기여도로 삼고 있다. 자신이 가정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느낀다면 새로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응팔’엔 갱년기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라미란을 위해 자녀들이 ‘리마인드 웨딩’을 올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 나이 50은 자신을 돌아보는 ‘고갯마루’다. 이 시기 여성들은 갱년기를 겪으며 심리적 우울을 경험한다. 마음은 젊은데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서글프다. 자칫 ‘황금기’가 ‘우울한 황혼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요즘 50대 엄마는 ‘베이비부머의 아내’이자 ‘청년백수 세대의 엄마’다. 퇴직한 남편, 취업 못한 청년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생업전선에 나선 엄마들도 많다. 이래저래 힘들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성취하는 자신을 믿어줄 수 있다면 낙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몰랐던 자아를 재발견하고 새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가족들도 50대 엄마가 처한 상황과 심경을 잘 이해하고 든든한 원군이 돼 줘야 한다.

가족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이 힘이 소멸되지 않도록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각박해지는 세상, 우리가 마지막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집이다. 추우면 덮고, 더우면 걷어내는 이불 같은 부모의 희생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곳이 집이다. 이런 부모를 알아봐 주는 자녀들이 있는 집이면 더 좋겠다. 명예퇴직 등으로 불안한 아버지, 갱년기 우울증으로 힘겨운 어머니, 그들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감사패를 만들어 주자. 가족의 이름으로. 이지현 종교기획부장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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