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석운] 예술가와 공무원 기사의 사진
지난해 12월 제주도를 다녀왔다. 영화 ‘양철북’의 원작자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귄터 그라스의 미술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제주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던 제주도의 풍경과 냄새는 역시 찬란했다. 하늘을 보며 제주도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과연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지몽매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영화 ‘양철북’의 원작자가 소설가 귄터 그라스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야 알았다. 그라스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그의 전시를 보고서 처음 알았다.

영화가 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래서 그 충격을 어떻게든 완화해 보려고 영화를 같이 본 일행과 함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전선이 엉킨 전봇대가 있는 작은 골목의 선술집으로 갔다. 자리에 앉고 나서 긴 침묵이 흐른 뒤 영화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한 번 시작된 이야기는 돌고 돌며 끝날 줄을 몰랐다.

독일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독특하고 빼어난 문학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라스는 놀랍게도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고 뒤셀도르프에서 판화와 조각을 전공했다. 전시장은 회화와 판화, 먹, 연필 드로잉과 조각으로 꾸며져 있었고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그림은 ‘양철북’의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기묘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장르별로 세련되게 설치된 작업들이 그의 문학적 원천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국내에서 출간된 그의 문학작품이 함께 소개됨으로써 전시는 그라스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방면으로,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잔치로 차려졌다.

이 전시는 제주특별자치도 산하의 미술관이나 미술과 관련된 전문 조직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문화정책과에서 처음으로 제주도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문화와 예술의 수준 높은 교류를 위해 준비한 전시다. 공무원이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뜻이다. 담당 공무원들은 이번 전시를 1년6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고 한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뒤로 ‘문화 예술’의 이름을 단 행사들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어서 내국인은 물론이고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주도를 찾을지는 미지수다. 제주도가 자연 유산만으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문화정책과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외양 좋은 건물과 시설에 걸맞은 좋은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을 것이고 새로운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을 것이다. 오랜 기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사례들을 연구하고 훌륭한 미술관의 전시를 찾아다니면서 안목을 키우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실히 파악했을 것이다.

문화정책을 수립하는 부서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행정직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예술에 관한 전문적인 정보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전시를 진행했다는 것이 경이롭게 보였다. 또 그런 일은 성과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시장인 제주현대미술관은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그들이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 ‘어떻게 이런 전시를 제주도에서 하게 됐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제주도 문화정책과의 공무원이 한 번의 행사를 통해 제주도를 수준 높은 문화 예술의 섬으로 만드는 시금석을 놓았다고 한다면 과장이 심한 걸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창조적인 발상에 박수를 보낸다. 귄터 그라스 재단의 뮤지엄 관장이 떠나면서 감동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제주도가 자랑스럽다”라고.

최석운(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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