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왜 開城이었나… 방중한 김정일에 “개성에 공단 지어라” 장쩌민 조언이 결정적

되돌아본 개성공단

[경제 히스토리] 왜 開城이었나… 방중한 김정일에 “개성에 공단 지어라” 장쩌민 조언이 결정적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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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아름답고 충격적인 전위예술”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998년 ‘소떼방북’에 대한 프랑스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의 표현)에서 시작된 개성공단이 좌초됐다. 정부가 지난 10일 개성공단 운영 중단을 공식 발표하면서 가동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개성공단은 착공 이후 약 13년 동안 남북 모두에게 정치적·경제적으로 큰 의미였다. 개성공단은 가동 시작부터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이었으며, 정치적 갈등과 긴장 속에서도 남북 화합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다.

◇고 정주영 회장 방북에서 시작=1988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남북 간 교역이 처음으로 시작됐지만 남북 경제협력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고 정 명예회장의 방북이다. 1998년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6월과 10월 두 차례 소떼 1001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신뢰를 얻은 정 회장은 1999년 다시 방북해 북한에 800만평 규모의 서해안공단개발계획을 제시했다.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는 “정 회장의 대북사업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없었다면 개성공단 사업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 정몽헌 현대 회장에게 개성을 공단후보지로 전격 제안했고, 이어 개성 등에 공단을 건설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7대 남북경협사업 합의서’를 체결했다.

◇왜 개성이었나=개성을 남북경협 사업의 전초기지로 선정한 데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물론 개성은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개성은 혁신적인 경영시스템 도입으로 상권을 장악했던 조선의 개성상인들이 활동했던 경제적 중심지였다. 개성상인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국가 전체의 경제를 좌우하던 대표적인 상인이었다. 또 정몽주가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조선 왕조 선택을 거부하다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를 맞아 숨진 역사적 사건이 말해주는 것처럼 개성은 정치적으로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전환되던 격변기에 주무대였다.

그러나 남북 분단 이후의 개성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경제적·군사적으로 적절한 입지가 아니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2001년 개성에 공단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현대로부터 받고 믿을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임 전 장관은 “개성 지역은 북측의 최전방 군사요충지로 군사전략적 차원에서는 결코 개방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현대가 입지로 생각하던 황해남도 해주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인접해 있어 북한이 ‘군부의 반대로 개방할 수 없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측과 북측 모두 개성을 최우선 입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개성으로 정해지기 전까지 현대는 서울·인천과 가까운 해주를 1순위 공단후보지로, 황해남도 남포와 평안북도 신의주를 2순위와 3순위로 각각 고려하고 있었다. 개성공단 건설 사업에 참여했던 김고중 전 현대아산 부사장은 “현대는 서울·인천과 공단개발을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구상”이었기 때문에 해주가 경제적 실익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신의주를 1순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은 신의주를 남한과 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의 투자를 유치하는 경제특구로 고려했다고 한다.

개성이 갑자기 떠오른 계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이다. 개성공단과 관련해 많은 연구를 해 온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에 따르면 북한이 공단 입지를 개성으로 바꾼 건 중국의 조언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2000년 5월 중국 방문에서 장쩌민 주석 일행으로부터 개성공단 설치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홍콩과 인접한 중국 선전 특구의 성공을 예로 들면서 남한과 인접한 개성에 경제특구를 만들라고 조언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 중국과 국경에 가까운 신의주에 남한 자본이 들어오는 데 대해 중국이 불편해했다고 전해진다.

현대 측도 개성은 나쁘지 않은 입지라고 생각해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개성공단 사업은 급물살을 탄다. 임동원 전 장관은 “남측으로서는 개성지역이 산업공단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전해들은 바(공단 입지가 개성이라는 사실)가 사실이라면 대환영할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긴장과 갈등으로 삐그덕=현대와 토지공사는 2004년 4월 공단 부지 조성 공사를 시작한 뒤 시범단지에 대한 분양을 시작했다. 2004년 12월 15일에는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이 생산됐다.

개성공단은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위기를 겪었다. 최대 위기는 2013년에 있었다. 김정은 정권이 등장한 2012년 12월 북한은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2013년 2월에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한다. 북한은 3월에는 정전협정 백지화, 판문점대표부 폐쇄, 개성공단 통신선 차단 등 조치를 취했다. 4월 들어서는 개성공단에 근무하는 북측 근로자 전원을 철수시켜 공장가동이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남한 정부도 공단에 근무하는 남측 인원을 철수시켰다.

그럼에도 개성공단은 정치적 갈등에 부침을 겪긴 했지만 비교적 원활하게 운영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과 11월 연평도 폭격 사건이 발생해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남한은 북한 사과 없이는 남북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5·24 조치’를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남북 경협 사업이 중단됐지만 개성공단 사업은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됐다. 경색 국면에도 개성공단은 2010년 9월 누적생산액이 10억달러를 돌파했고, 2012년 1월에는 북측 근로자 규모가 5만명을 넘었다. 2013년 1월에는 누적생산액이 20억달러를 넘어섰다.

◇경제적으로 남북 모두가 윈윈(win-win)=남북의 정치적 갈등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이 성장을 거듭한 것은 남북 모두에게 개성공단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에게 개성공단은 중요한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북한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에서 임금수입, 중간재 판매액, 토지임대료 등으로 3억754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통일부는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매년 1억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방 국가의 대북 경제 제재로 마땅한 벌이가 없는 북한에게 개성공단은 없어서는 안 될 창구인 셈이다.

남한에게도 개성공단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돼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남한이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 개발로 얻은 직접적 경제효과가 32억6400만달러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 외에 개성공단은 높은 임금과 임대료 등에 시름했던 국내 의류·섬유 등 노동집약형 중소기업에 대안 투자처였다.

세종=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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