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경원] 너의 이름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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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말했는데도, 마주 앉은 변호사는 받아든 명함을 유심히 살폈다. 남의 명함을 잘못 건넸나 싶을 정도였다. “사림, 네오 사림… 그러니까, 새로운 선비정신 같은 것인가요?” 검사장 출신임을 숨기지 못하는 날카로운 눈길이 어설프게 조합된 이메일 아이디에 머물러 있었다. 쑥스러운 명명(命名)을 들켰지만, 뜻을 알아주는 말은 일견 반갑게 들렸다. 이메일을 짓던 중학생 시절에는 훈구(勳舊)보다 사림(士林)이 훨씬 매력적이었다고 대답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명함을 받으면 꼭 이메일 주소를 읽어봅니다. 예전에 선조들이 호(號)를 지었다면 요즘 세상에선 이메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지은 이름엔 마음속으로 지향하는 바가 스며들더라고 말했다. 누구는 사물, 누구는 격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 관찰하는 길이라고도 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마음가짐에, 때마다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일방적인 덕담이 면구스러워 얼른 내 손의 명함을 봤지만, 그의 이메일은 이니셜과 숫자의 조합일 뿐이다.

겸연쩍게 웃는 한편으로는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짓느라 애면글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과태료의 위기에 처하도록 원고지 0.01매를 좀체 마감하지 못한 데에는 ‘그 두 글자가 영원히 너를 향할 텐데’하는 조바심이 있었다. 미아리 골목 명리학자는 못 되더라도 옥편을 찾고 또 찾으며, 이름에 신비로운 힘이 깃들 거란 믿음은 얼마나 강력했는지….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는 기원전에 벌써 “이름은 곧 예언”이란 말을 남겼다. ‘이익(lucris)’이란 이름의 여자 노예를 꼭 사들이라 권하는 장면이었다.

펀드명만 바꿨는데도 투자자들이 늘었다고 반색이던 자산운용사 직원을 만난 적도 있다. 상품의 체계야 매일반이지만 투자자를 한 방에 사로잡은 건 역시 이름이었다며, 브랜드네이밍 시장의 규모가 왜 3000억원을 돌파했는지 알 법하다고 했다. 스타벅스 고객들은 ‘흰고래 모비딕’의 1등항해사 스타벅과 은연중에 모험을 떠나는 셈이라는 분석도 회자됐다. 법원 문턱을 넘어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해마다 15만명을 웃도는 추세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금전의 이익뿐일까. 이름대로 이룬다는 믿음은 생사를 좌우하기도 했다. 마르코만니족 장군은 사자 군단에 겁먹은 병사들에게 “저것은 로마의 개다!”라고 외쳐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정복대가 탄 말을 처음 보고 ‘집채만큼 큰 사슴’ ‘신의 형상’이라며 두려워한 아즈텍인들은 고전했다. 호랑이로 알고 쐈을 때엔 화살촉이 바위를 뚫었는데, 바위인 줄 알고 나니 아무리 힘껏 쏴도 박히지 않더라…. 사석위호(射石爲虎)의 고사가 말해주는 것도 결국은 이름의 플라시보 효과다.

명명철학이 화려할수록 이름값을 못 하는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지시된 실제가 이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아름다운 이름도 그저 번지르르해진다. 대학 시절 학회장을 맡았을 때 어울려 놀러다니기만 했더니 한 선배가 “네 일을 학회라 부를 수 없다. 학은 없되 회만 있다”고 비판했다. 볼테르는 ‘보편사적 문화사 전망’에서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 않고, 로마와 무관하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다”고 말했다. 이 계몽철학자의 일갈을 차용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은 사기다.

여전히 언어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는 게 인문학계의 결론이며, 해석을 각인하는 최초의 언어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시민사회는 정부와 의회가 짓는 이름들이 네이밍인지 프레이밍인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제목만 보고 기사를 읽었다 말하기 어렵듯 이름만 듣고 내용을 전부 파악할 수 없다. 테러 방지의 숭고한 가치에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그 법안의 이름이 실제와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연설들이 192시간을 잇대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적잖은 이들은 ‘국정원강화법’이라는 명명이 더 적당하다고 했다.

역사 국정 교과서도 정부가 지은 이름 그대로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명명이 완벽하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세상에 단 한 권만 남기겠다는 그 교과서는 단군조선을 한낱 신화로 보는 교수가 대표로 쓰려던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복면을 쓴 채 집필 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합의’는 차라리 슬프게 들리는 이름이다. 오욕의 당사자들이 빠진 협상에서 어떻게 합의를 명명하는가. “이름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걱정이 없겠습니까.” 눈매와 달리 따뜻한 변호사에게 민망함을 덜고자 건넨 말이었는데, 말하고 나니 여러모로 진심이었다.

이경원 사회부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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