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이스탄불, 순수 박물관에 가다 기사의 사진
필자 제공
사람도 그렇듯 유독 인연이 있는 도시가 있다. 내게는 터키의 이스탄불이 그랬다. 맨 처음 이스탄불에 간 건 2001년 봄이었다. 그 시절 뉴욕 맨해튼 한인 타운에서 김치를 잔뜩 사서 비닐봉지에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아 커다란 가방에 넣은 뒤, 뉴욕발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탔다. 남편을 따라 이스탄불에서 살던 사촌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뭘 사다 줄까?” 하는 내 말에 언니는 김치를 가지고 올 수 있는 한 많이 가져오라 했다.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언니와 함께한 이스탄불의 봄은 아름다웠다. 그때의 이스탄불은 내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들과 신비롭고 그로테스크한 공간이 꿈처럼 펼쳐지는 지하궁전과 수없는 붉은 지붕들, 보스포루스 해협의 탁 트인 푸른 물결로 남았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갔었고, 몇 년 전 실크로드 탐사기획의 일환으로 다시 이스탄불에 갔었다.

그때 가본 이스탄불의 좁은 골목길들이 잊히지 않는다. 1445년 세워진 대중목욕탕이 600년 가까이 뜨거운 온기를 뿜어대고 있는 이스탄불의 추크르주마 골목에 가면,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저자 오르한 파묵이 만든 ‘순수 박물관’이 있다. 어릴 적 살던 좁은 골목길 옛집을 사들여 파묵은 그가 쓴 소설 ‘순수 박물관’을 현실로 재현해 놓았다. 소설 주인공인 한 남자와 여자, 그들과 관련된 상상 속의 물건들을 고물장수나 벼룩시장 등에서 사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찬 그곳은 상상 박물관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 박물관이다. 파묵은 독자가 직접 거닐면서 추억 속의 물건들을 볼 수 있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 소설 속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264번 나온다. 마지막 문장은 “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주인공 케말의 고백으로 끝난다.

어쩌면 우리의 사랑도 다 상상이 아니었을까? 박물관 1층에 올라서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소설의 첫 문장이 한쪽 벽에 기록되어 있다. 문학이 현실로 재창조된 신비하고 독특한 이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의 지나간 삶과 사랑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여주인공 퓌순이 입었던 원피스와 스푼, 귀걸이와 립스틱, 케말이 수집한 퓌순이 피운 4212개의 담배꽁초는 개별 꽁초마다 피운 시간이 기록돼 있다. 퓌순이 피운 첫 번째 꽁초는 1976년 10월 23일, 그녀가 죽기 전에 피운 마지막 꽁초는 1984년 8월 26일로 적혀있다. 주인공 케말은 사랑의 고통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했던 그녀가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3층짜리 목조 박물관 안에는 소설 속 여주인공의 영혼이 묻어있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을 쓴 작가이자 소설의 내용 그대로를 박물관으로 만든 파묵은 사랑은 행복한 질병이라 말한다. 사랑과 박물관은 추억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관계가 깊다.

그 인상적인 작은 박물관을 돌아보며 언젠가 나도 파묵처럼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지나간 삶과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그곳에 펼쳐놓으리라.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 그곳에서 나누었을 서툰 첫 키스. 오랜 세월 뒤 다시 만난 사람에게 느낀 실망감도 빠져서는 안 될 목록이다. 파묵이 빠트린 건 사랑의 유효기간이다. 사랑은 변하고 시간은 흘러가도 주고받은 손편지들과 사소한 사물의 흔적들은 끈질기게 영원히 남아있다. 사랑박물관에서 음악을 빼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박물관을 만든다면 산울림의 노래 ‘창문 넘어 옛 생각이 나겠지요’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으리라.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펄 시스터즈가 부르던 그 노래도 박물관의 한 구석을 치장하고도 남으리라. 지나간 우리들의 사랑의 배경에 늘 잔잔히 흐르던 그 노래들을 기억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맞고말고. 그런 거지같은 사랑은 요즘도 트럭에 ‘오래된 모든 물건 다 삽니다’ 하고 붙여놓은 고물상 아저씨한테나 줘버려라 싶다.

하지만 아무리 이혼을 밥 먹듯 하고 아프면 버리고 변심하면 애인을 죽이는 사건이 난무하는 요즘에도, 라디오를 듣다가 들은 이런 사랑의 사연에 문득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내 친구, 남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내가 만든 사랑 박물관엔 흔할 것 같은데도 귀한 이런 사랑을 전시하고 싶다. IS 대원이 되려고 터키로 들어가 시리아로 건너 간 한국의 고독한 청년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젊은이여. 터키에 가면 그저 어슬렁거리며 여행을 해라. 그리고 순수 박물관에 가라.”

황주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