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삶의 끝을 아름답게 1부 ⑤] 소외계층 ‘존엄한 죽음’… 공공형 호스피스에 달렸다 기사의 사진
서수연 호스피스 전문간호사가 지난 16일 부산 해운대구에 사는 간암 말기 권옥남 할머니를 찾아가 혈압을 재고 있다. 부산시 호스피스 완화케어센터 소속인 서 간호사는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해 혈당, 혈압을 측정하고 병원까지 동행한다. 아로마 마사지나 임종교육 등도 한다. 부산=전수민 기자
1부 : 호스피스, 나를 위한 선택
⑤ 공공형 호스피스 확산돼야


"얼마만의 외출인지 몰라. 두근두근해요."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16일 오전 정모(55·여)씨는 검정 패딩과 털모자에 털장갑까지 끼고 부산 수영구의 집을 나섰다. 털장갑 안의 두 손은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다. 정씨는 15년째 피부와 장기가 차츰 섬유화되는 전신피부경화증을 앓고 있다. 부산시 호스피스완화케어센터 소속 사회복지사 김내현 팀장과 손민희 호스피스 전문간호사가 정씨의 외출 준비를 돕고 외래진료가 있는 부산대병원까지 동행했다.

"엄마, 엄마." 같은 날 오후 서수연 호스피스 전문간호사는 부산 해운대구의 한 다가구주택 문을 두드렸다. 파란 스웨터 차림의 권옥남(82·여)씨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문을 활짝 열었다. 2014년 7월 간암 말기로 절제 수술을 받은 권씨는 합병증과 싸우며 복막투석 중이다. 그는 서 간호사가 맡은 45명의 말기 암 환자 가운데 한 명이다.



삶도, 죽음도 돌볼 겨를 없는 그들

남편과 사별한 권씨는 한 칸짜리 방에서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C형간염이 간경화로 이어지면서 끝내 말기 간암이 됐다. 부산백병원에서 진단 나흘 만에 급하게 수술 일정을 잡았다. 주치의가 수술 포기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했다. 수술 이후 암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신부전증과 당뇨가 합병증으로 찾아왔다. 혈압 조절도 잘 되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이뤘다. 툭하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언제 다시 암세포가 커질지, 삶을 언제까지 이어갈지 알 수 없었다. 때마다 권씨를 챙겨주고 병원으로, 집으로 찾아오는 이는 교회 담임목사뿐이었다. 따로 간병인을 두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형편도 아니다.

정씨도 비슷하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남편과 이혼한 뒤 기초생활수급자가 됐고 덜컥 희귀난치성 질환이 찾아왔다. 병이 깊어지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폐가 3분의 2 정도 굳어지면서 호흡도 힘들다. 이런 정씨의 보호자는 고관절 수술을 받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89)다. 돌봄이 필요한 어머니와 정씨가 서로를 챙기다 보니 매사가 힘에 부쳤다.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왔고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존엄한 죽음'은 사치였다.

권씨와 정씨의 삶은 지난해부터 달라졌다. 부산시가 운영하는 공공형 호스피스완화케어사업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남은 삶을 조금이라도 편히 보낼 수 있게 됐다. 두 사람은 한두 달 간격으로 찾아오는 보건소 가정간호서비스 대상자였는데 가정간호팀이 이들을 부산가톨릭대 산학협력단 안에 설치된 호스피스완화케어센터로 연계했다.



보건소, 소외된 말기 환자를 품다

센터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8명의 호스피스 전문간호사와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들은 16개 보건소에 배치돼 가정간호팀이나 지역 병원으로부터 인계받은 말기 환자들을 1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2∼4시간을 함께한다. 혈당, 혈압 등을 측정하고 병원까지 동행한다. 아로마 마사지나 임종 교육 등 심리·사회·영적 돌봄도 제공한다. 임종 뒤에는 유족 대상 치유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이 호스피스 프로그램은 지역보건의료와 사회서비스를 통합한 보건소 기반 공공형 호스피스다. 우리나라에선 최초이자 유일한 모델이다. 가정호스피스와 비슷하지만 본인 부담액이 없다. 암뿐 아니라 비암성 말기 질환자까지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훨씬 포괄적이다. 사회·경제적 취약계층 말기 환자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다. 정씨는 "언제든지 달려와 가족처럼 챙기는 선생님들 덕분에 이제 여한이 없다. 하나님 곁에 가는 게 두렵지 않다"고 했다.

부산시는 2009년 금정구, 부산진구에서 시작한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지난해 16개 보건소 전체로 확대했다. 지난해에만 재가 암 환자 관리사업의 말기 암 대상자 1167명 가운데 490명(41.9%)을 돌봤다. 2014년 기준 국내 완화의료전문기관 서비스 수혜율(13.8%)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효과를 보고 있는 셈이다. 부산시는 올해 600명으로 대상자를 늘리고 지역사회 전체가 질 높은 죽음을 맞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가장 시급한 일은 양질의 인력 확보다. 지금은 전문간호사 한 사람이 2개 보건소를 담당하고, 센터 전속 사회복지사도 2명뿐이다. 서수연 간호사는 "상황에 따라 의사도 간호사도 봉사자도 보호자도 복지사도 돼야 한다. 혼자 50명에 이르는 환자를 돌보다 보니 더 자주, 오래 방문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했다.

지역의료의 '부모' 거점병원

울산 유일의 호스피스병동을 갖춘 울산대병원은 '말기 암 환자가 어디서든 마음 놓고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게 하자'는 모토로 공공형 호스피스에 접근하고 있다. 호스피스병상이 12개뿐이라 입원 기간을 2주로 한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울산대병원은 보호자가 없거나 혼자 사는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병동에서 퇴원하면 보건소에 주기적 모니터링을 요청한다. 이런 방식으로 지난해 11명이 후속 관리를 받았다. 지난해 보건소 가정방문으로 확인한 6명의 말기환자가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기도 했다.

울산대병원은 2013년부터 중소병원과 요양병원을 대상으로 완화의료 실무교육도 하고 있다. 울산시는 지원금 4500만원과 함께 지역 모든 병원에 교육 참여를 독려하는 공문을 보냈다. 지난해 지역 병원 2곳, 요양병원 4곳 등에서 33명이 말기 암 환자 치료에 대한 노하우를 얻어갔다. 호스피스병동에서 퇴원하는 환자에게는 교육을 이수한 협력병원 4곳을 우선 소개한다.

환자들도 만족하고 있다. 말기 간암 진단을 받고 지난달 울산대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긴 정모(54)씨는 "통증이 오면 요양병원 간호사가 울산대병원에 전화해 조치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고수진 울산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3차병원은 지역 내 말기환자가 편안한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역병원을 교육하는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울산=전수민·박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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