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범] 디자인과 사회개혁 기사의 사진
“선생님,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어떻게 바꾸고 싶은데.” “음, 그러니까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디자인을 하고 싶다구요.” “좋은 생각이군. 그런데 그러면 세상이 바뀌는 걸까?” “왜요. 선생님은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디자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반대로 세상이 디자인을 바꾸지. 하하.”

“하지만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그런 디자인은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그리하여 결국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소외된 사람들이 디자인으로 인해 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가?” “네, 그럴 수만 있다면요.”

“카이스트의 어떤 교수님은 스스로 나눔 디자이너라고 하면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하자고 하던데요.” “물론 그런 건 좋아. 나는 그런 분들의 노력을 경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군.” “미국의 디자인 교육자 빅터 파파넥은 가난한 사람, 장애인, 제3세계를 위해서 디자인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파파넥은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디자인은 하지 않고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만들어낸다고 비판했지. 하지만 그는 정작 디자이너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를 가리켜 디자인계의 자선사업가, 슈바이처라고도 부르지. 나는 왠지 그가 디자인계의 파파 스머프 같단 말이야, 이름도 비슷하고, 하하.”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가네요.” “디자이너 개인이 사회적 책임감을 갖는 것과 현대 디자인이 처한 사회적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거지. 내 얘기는 전자만 가지고는 되지 않고 후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디자인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거야. 독일 철학자 볼프강 하우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인이 하는 역할은 전쟁에서 적십자가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고 말했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처에 붕대를 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다시 전쟁터에 내보내는 거지.” “결국 디자인이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지. 하지만 자네의 진짜 관심은 세상을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디자인을 바꾸는 것인가?” “아, 그거야 뭐.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부터 바꿔야겠지요. 좋은 디자인은 분명 세상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 말이죠.”

“자네가 말하는 세상을 바꾼다는 게 과연 뭘까? 혁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자네는 세상이 아니라 디자인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혹시 자신이 하는 디자인이 뭔가 의미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 이미 말했듯이, 디자인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세상은 디자인을 바꿀 수 있거든. 그러니까 정말 자네가 원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면 먼저 세상을 바꾸라고. 그러면 자연히 디자인도 바뀔 테니까.”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세상으로 디자인을 바꾸라구요?” “물론 그것이 훨씬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냐.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디자이너 이전에 먼저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왜, 언제나 디자이너라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 건가? 어쩌면 자네가 원하는 디자인조차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질 거야. 왜냐하면 디자이너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시민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시민으로서의 디자이너라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아무렴, 마침 선거도 다가오는데 말이야. 하하.”

최범(디자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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