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평양說은 사실” VS “이동·교역 가능성 무시”… ‘한국 상고사 쟁점: 왕검성·한군현’ 토론회 기사의 사진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 상고사의 쟁점: 왕검성과 한군현’ 토론회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병주 기자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 왕검성(또는 왕험성)과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군현(또는 한사군)의 위치는 상고사 최대 쟁점이다. 그동안 한군현 중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 인근이었다는 주장이 학계 다수설을 이뤄왔지만 재야 사학계를 중심으로 요서나 요동반도였다는 반론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왕검성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는가, 아니면 중국땅 요동이나 요서에 있었는가의 문제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국가적인 문제로 격화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표기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했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2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 대회의실에서는 이 뜨거운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는 토론회가 열렸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한국 상고사의 쟁점: 왕검성과 한군현’ 토론회가 그것으로 4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정인성(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평양 부근의 대표적 낙랑 유적으로 꼽히는 토성리토성에 대한 일본 사학계의 일제 강점기 발굴 과정을 자세히 검토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을 부정하는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낙랑유적 위조설을 반박했다. 정 교수는 “토성 발굴 과정에 실제로 15점 이상의 봉니(문서 같은 것을 끈으로 묶고 봉할 때 사용했던 진흙 덩어리) 등 낙랑 유물이 출토된 게 사실”이라며 “봉니가 대부분 진품이라는 주장은 좀더 신중하게 검토돼야 하지만 발굴과 출토 정황이 분명한 자료 중에서 여전히 낙랑군평양설을 지지하는 것이 압도적”이라고 말했다.

조법종(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사기’ 등 관련 기록들을 분석해 “낙랑은 현재의 평양 일대에 존재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문헌, 유적 등 낙랑군평양설을 부정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왕검성을 낙랑성으로 동일시해 평양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왕검성 함락(기원전 107년) 이전에 낙랑군이 설치(기원전 108년)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복기대(인하대 융합고고학) 교수는 ‘한군현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자료 비교’ 발표문에서 “유물 중심의 기존 고고학적 연구는 이동이나 교역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문헌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이 설립된 당시 위치는 분명히 현재 중국 허베이성 동북부와 랴오닝성 서남부”라며 “수·당 세력이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중국 세력의 최동단에 있었던 낙랑도 점점 동진해 최후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기록되기 이르렀고, 일본 학자들이 이 기록을 근거로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평양설을 공고하게 다졌다”고 주장했다.

박성용(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박사는 군사학적 입장에서 당시 한나라의 위만조선 공격을 분석하고, “당시 한나라의 공격 목표가 평양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올해 분기별로 상고사 연속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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