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지현] 죽음은 최후의 사명 기사의 사진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크레타의 한 줌 흙을 손에 꼭 쥐고 다니면서 벅찬 고뇌의 순간마다 힘을 얻었던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자의 모습 같다. 그는 세 종류의 인간이 존재하며 각각의 인간이 하는 기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우린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잘 죽는 것이고, 잘 죽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잘 살고 잘 죽느냐’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명제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소명인 것이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많이 다르다.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삶은 죽음을 기피하면서 사는 삶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 훨씬 많고, 불필요한 욕심도 버릴 수 있다. 대부분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이란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 꺼리는 삶 속에서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카잔차키스가 말했듯이 우린 그 순간 눈물을 흘리는 노예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마셔서 이제는 아쉬운 바가 없는 왕처럼 이 땅을 떠나야 한다.

죽음은 최후의 사명이라고 여긴 이가 또 있다.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평생 병마와 싸웠다.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 성경 ‘욥기’를 읽으며 투병했고 그 가운데 글을 썼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직장암 수술을 받았으며, 만년에는 파킨슨병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쁨으로 작가활동을 했다. 그는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다.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고통을 통해 주님의 구원의 빛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잘 죽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내면의 점점 커지는 빛, 기쁨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썼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성경 말씀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생애 목표였다. ‘복음증명의 문학’을 선택한 것이다.

절망을 넘어설 때마다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지금 이 시간 육체적인 질병을 만나 가장 깊은 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떤 고난 속에도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또한 그분의 손길을 느껴 위로를 얻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카메라로 밤하늘의 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렌즈의 조리개를 열어 빛이 모아지길 기다려야 한다. 인생이 캄캄할 때 역시 마음의 조리개를 열어야 한다. 인내하고 기다리면 우리를 위로해주는 희미한 빛들이 모아져 인생의 밤하늘을 밝혀줄 것이다.

내일은 부활주일이다. 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전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두려움과 고통의 길을 가셨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가 이 사실을 증거했듯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삶 속에서 증거해야 한다. 썩은 밀알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마른 나무에서 새순이 자란다. 전쟁이 평화를, 공포가 희망을, 억압이 자유를, 미움이 사랑을 가져오는 부활의 아침이여 어서 오라.

이지현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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