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정미조와 박인희의 컴백 기사의 사진
한동안 귀를 의심했다. 정치권 공천 갈등이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는 와중에 들려온 정미조와 박인희의 컴백 소식은 충격이었다. 유폐를 자청했던 사람이 울타리를 걷어차고 나오다니. 각자 66세, 71세라고 했다. 호적을 둘러싼 예전의 풍속을 감안하면 실제 한두 살 더 많을 수도 있다. 저 나이에 노래를 한다는 게 괜찮은가. 누구를 위해 노래를 한다는 걸까. 자신을 위해? 팬들을 위해? 혼자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했다.

정미조는 싱그럽다. 가창의 위엄도 남다르다. 그가 미대 교수로 있을 때 인사동 전시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언행을 각별히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프랑스 박사 출신의 실력파인데도 왕년의 인기가수의 후광을 업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한 경계심의 발로, 혹은 대학에 적을 둔 교육자의 근신이었으리라. 가르침은 어땠는지 몰라도 화단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아티스트의 치열함을 볼 수 없었다.

돌아온 모습은 달랐다. 사진기자나 편집기자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감안해도 50대 정도의 얼굴로 보였다. 안정된 생활 속에 자기관리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다. 정년을 마친 홀가분함도 있겠다. 겨우 7년에 그친 가수생활에 아쉬움이 왜 없겠나. 헤드폰을 낀 채 신곡 ‘귀로’를 부르는 모습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굴곡이 완만한 노래이기는 해도 성량은 풍부했고, 호흡도 짧지 않았다. 스며들 듯 노래를 장악하는 연륜이 돋보였다.

박인희의 귀환은 더 놀라웠다. 통기타에 나팔바지, 생머리의 청초한 이미지, 수도자처럼 정갈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할머니로 돌아오다니 당혹스러웠다. 우리 젊은 날의 술자리는 그가 낭송하는 ‘목마와 숙녀’로 인해 늘 슬펐고, ‘목마’가 놀이공원의 화려한 회전목마가 아니라 상여의 은유인줄 알고는 더욱 상심했다. 박인희 또한 목마의 방울소리를 들으며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로 떠난 줄 알았다. 그게 1981년이라고 했다.

이번에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박인희는 예의 그 단아함 속에 여전히 방랑자의 편린이 묻어났다. 37년 세월의 강을 건너왔는데도 눈동자와 입술, 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미간에 저렇게 굵은 점이 있었던가. 그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와 빅서의 해안을 걸으며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해주던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게 왜 지금일까.

두 사람의 컴백은 모험이다. 명절에 나와 옛 노래를 들려주는 이미자가 아니다. 윤항기 윤수일과 같은 노병의 이벤트도, 하춘화와 남진의 송년 디너쇼도 아니다. 조용필처럼 현역으로 뛰겠다는 거다. 정미조는 11곡의 신곡이 수록된 앨범을 내놓으면서 국내 굴지의 LG아트센터 무대에 선다. 박인희는 송창식과 더불어 ‘그리운 사람끼리’라는 이름으로 전국 투어를 한다.

모험에는 성패가 따른다. 짐작컨대, 시장의 반응이 있으리라. 7080세대는 옛 친구를 반기며 지갑을 열 것이다. 그러면 성공일까.

나는 2008년 1월 나나 무스쿠리의 센트럴시티 공연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리스보다 더 유명한 그리스 출신 가수에 대한 팬들의 환호는 넘쳤으되, 나는 후회했다. ‘울게 하소서’를 들을 때, 저 에게해의 맑은 파도소리가 아니라 갈라진 쇳소리가 났다.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 복고시장의 부침에 일희일비 말라고, 기획사의 흥행 전략에 휘둘리지 말라고, 힘이 부치거나 여차하면 무대에서 내려와도 좋다고. 노래가 좋으면 노래와 함께 삶의 기쁨을 오래도록 누리길 바랄 뿐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기에, 아련한 연인으로 남아있기에, 그것으로 족하기에.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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