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유성열] 야성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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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런던의 영국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다. 그 유명한 로제타석이나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도 가볍게 감상하고 지나쳤지만 유독 전시물 하나가 발걸음을 꽉 붙잡았다. 다소곳이 앞발을 모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양이상이었다. 생기가 느껴질 정도로 정교했다. 이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고양이를 수도 없이 관찰했을 이름 모를 고대 이집트 장인의 애정이 수천년 시간을 뛰어넘어 전달되는 듯했다.

고양이와 첫 인연은 우발적이었다. 평소 즐겨 보던 웹툰에서 여러 작가들이 자신의 고양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대개 고양이와 함께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주된 내용이었다. 다른 반려동물과 어떤 다른 점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집착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2013년 겨울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약속을 잡고 나간 장소에는 담요에 싸인 채 사람 손에 들린 주먹 크기 정도의 생명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가느다란 앞발을 무력하게 뻗으며 울어대는 아기 고양이를 처음 보고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19대 왕 숙종은 고양이를 애지중지했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극도로 달했던 시기를 살았던 왕은 ‘금손’으로 손수 이름 붙인 노란 고양이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 왕의 고기반찬을 먹이는가 하면, 정무를 볼 때 곁에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숙종이 승하하자 금손은 식음을 전폐했고, 13일 만에 그의 뒤를 따랐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다소 각색이 개입된 것 같지만 아무튼 금손은 숙종 곁에 묻혔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아비시니안이라는 품종이 있다. 이마에 M자 무늬로 검은 털이 나 있고 근육이 발달했고 성격도 발랄하다. 19세기, 지금은 에티오피아로 불리는 아비시니아에서 자생하고 있던 고양이를 당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이 배에 태워 영국으로 들여왔다. 오죽 예뻤으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집에 갈 때 데려갈 생각을 했을까. 고대 이집트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와 닮았다고 해서 파라오가 키우던 품종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녀석인 건 분명하다.

고양이는 개처럼 인간을 잘 따르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애교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사냥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낯선 사람으로부터 집을 지켜주지도 않는다. 참 말도 안 듣는다. 이 때문에 도대체 왜 개가 아닌 고양이를 키우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인식도 분명히 있다. 대소변 가리는 훈련을 따로 시키지 않아도 되고, 사료를 알아서 조절해서 먹고 자주 씻기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성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교수는 저서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가 자신들의 손으로 야성을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머나먼 과거에 인간 개개인은 현재보다 우월했다는 주장이다. 육체적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환경과 관련해 더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그들보다 월등하다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퇴보한 측면을 강조한다. 이른바 농업혁명으로 눌러앉기 시작한 인류는 예상치 못했던 고통을 떠안게 됐다. 단 하루의 수렵과 채집으로 가족 전체를 며칠 동안 먹여 살릴 수 있었지만, 농사는 매일같이 반복적인 노동을 쏟아부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다. 사회조직이 복잡해지면서 계급은 세분화됐고 빈부격차는 벌어졌다. 과연 우리가 ‘원시인’보다 행복한 게 맞는지 작가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반면 고양이는 여전히 야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존재다. 집을 나간 개는 다시 돌아오지만 개와 비교해 길들여진 역사가 짧은 고양이는 야생의 삶에 금방 적응한다. 고양이과 동물 대부분은 혼자 사는 생활패턴에 익숙하다. 서열의 개념도 희박하다. 이 점에서는 집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불러주어도 쉽게 반응하거나 오지 않는다. 복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스스로가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는 ‘밀고 당기기’의 고수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넘쳐흐르는 모습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야성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를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늘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자연과 야성미에 대한 원초적인 동경이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잠을 청하는 이 작은 동물을 향한다. 씨앗을 뿌리고 쟁기를 잡기 전 우리 인류도 그랬을 게다. 보석이 박힌 듯한 고양이의 눈처럼 반짝이는 직관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그 시절이 그립다.

유성열 산업부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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