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범] 문화의 잡종화와 새로운 전통 기사의 사진
한국학자 최봉영 교수는 저서 ‘본과 보기 문화이론’에서 순종 별종 잡종 신종 같은 유전학 개념을 가져다 문화를 설명한다. 생물 종처럼 인간의 문화에도 순종 별종 잡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화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전통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니까 순종 지향은 특정한 하나의 전통에 집착하는 것이고, 별종 지향은 하나의 전통에 집착하는 것에 반발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잡종 지향은 다양한 전통을 통합해 새롭게 구성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국이 매우 강한 순종 지향의 사회임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는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문화변동은 전통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불가피한 잡종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예의 세 가지 지향성은 문화변동의 진로를 결정하는 방향타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잡종화 과정으로서의 문화변동에서 순종 지향은 그러한 변화에 반발하고, 별종 지향은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잡종 지향은 선별적인 작용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거나 변용시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에 대해 강한 순종 지향적 태도를 지닌 한국사회가 지난 100여년간 겪어온 근대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문화변동은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사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주체적이지 못한 만큼이나 분열적이다. 주로 근대화가 경제 영역을 중심으로 추진돼 온 반면 문화 영역에서는 순종 지향적인 태도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개화기 때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아닐까 한다.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고 정신은 우리 것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니 얼핏 보면 매우 주체적인 것 같지만 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의 잡종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 창조의 의지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은 의외로 성공적이어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우리 근대문화의 실상이 순종적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그러고자 했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허위의식이고 분열증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통과 근대, 고유와 외래라는 구별은 더러는 전자 계열에, 더러는 후자 계열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순된 이분법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순종 지향 사회의 필연적 결과다. 최 교수는 가치를 고유에 두는 것이나 외래에 두는 것이나 그 기원만 다를 뿐 사실상 동일한 순종 지향적 태도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모두 잡종 지향에 대한 폄하와 부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전통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든 간에 문화변동은 그 자체로 잡종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다시 최 교수의 말을 빌리면, 문화변동은 순종에서 잡종을 거쳐 다시 순종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화는 순종과 잡종의 지속적인 교체 과정인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순종적 관점에서 보면 문화의 타락과 회복의 반복이겠지만 별종이나 잡종적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전통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너나없이 하이브리드(잡종)를 말하고 융·복합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문화에서의 잡종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민족문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순종으로서의 전통에만 얽매이지 말고 근대화 과정에서 생산된 잡종문화를 새로운 전통으로 빚어내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새로운 전통은 잡종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잡종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최범 디자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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