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청년] “듣지 못하고 시력 잃어가지만 1%의 희망을 그려요”

두 살 때 청력 잃고 망막색소변성증까지… 토끼 캐릭터 ‘베니’ 작가 구경선씨

[예수청년] “듣지 못하고 시력 잃어가지만 1%의 희망을 그려요” 기사의 사진
구경선 작가가 지난해 2월 자신이 쓴 책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머리에 올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구경선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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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선(33·여) 작가는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현재로선 그가 앓고 있는 망막색소변성증을 고칠 방법이 없다. 30년 넘는 세월을 듣지 못한 채 살았는데 앞도 볼 수 없을 것이란 이야기까지 들었을 땐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왜 하필 저인가요.’ 좌절을 안고 떠난 필리핀 선교에서 태풍으로 모든 걸 잃은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구 작가가 그려준 그림을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보물지도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엔 하나님이 저를 잘못 만드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림을 통해 그 소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 하나님이 저를 만드신 이유를 찾았죠. 하나님은 그 목적에 따라 저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가고 계세요.”

8.8㎝ 시야로 본 첫눈의 아름다움

구 작가는 두 살 때 열병을 앓다가 청력을 잃었다. 당연히 말을 배우기도 어려웠다. 그가 소통의 도구로 사용한 건 그림이었다. 그는 토끼 캐릭터 ‘베니’를 만들었다. 필리핀 소년에게 그려준 그림도 베니였다. 토끼는 청각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는데 베니는 토끼치고도 귀가 유난히 컸다. 구 작가는 베니가 자기 대신 잘 들어주길 바랐다. 베니는 2009년부터 싸이월드의 인기스타가 됐다. 16만명이 미니홈피 배경화면에 쓰겠다고 내려받았다. 적막한 세상 속에 살아온 그는 이런 관심이 좋았다. 그러나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싸이월드를 대신하면서 구 작가도 갈 곳을 잃고 한동안 낙심한 채 살았다.

하루는 주일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찬양을 부르며 행복해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 혼자만 슬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거워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듣지 못하는 그에게 처음으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 안다. 너의 고통과 슬픔을 내가 다 안다.…”

2013년 9월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좁은 관을 통해 세상을 보듯이 시야가 좁아지다가 끝내는 실명하는 병이다. 지금 그의 눈은 지름 8.8㎝까지 볼 수 있지만 관이 점점 작아져 닫히는 순간 세상은 암흑이 된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점점 기능을 잃어가는 눈은 그렇게라도 존재를 드러내려 발버둥쳤다. 그해 11월 27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모습은 그동안 많이 봤지만 눈이 예뻐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동안 내가 수많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았구나 싶었죠. 당장 오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그리고 다짐했죠. 좌절하고 있을 게 아니라 시력이 사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실천해야겠다고 말이에요.”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구 작가는 바로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를 써내려갔다. 작업실 마련하기,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주기, 소개팅 하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연락처 묻기, 혼자 영화보기, 돌고래와 헤엄치기, 해 뜨는 것 보기, 손톱에 봉숭아 물 들이기….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이의 버킷리스트는 아주 소소한 것들로 채워졌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중복 장애인 헬렌 켈러(1880∼1968)는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날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고 적었다. 구 작가는 자신이 다니다 그만둔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왔다.

그의 버킷리스트엔 ‘헬렌 켈러의 소원 대신 들어주기’도 적혀 있다.

요즘엔 빛을 잃을 준비를 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점자를 읽는 연습을 한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 돼있는데 점의 개수와 모양을 손끝으로 읽는 건 여전히 어렵다. 밤에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기도 한다. 미얀마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그림을 그리는 맹화가가 있다는데 그를 찾아가 볼 생각도 있다. 보지 않고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어서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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