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홍의락 당선자 “1번만 찍던 ‘대구 인력의 법칙’ 옛말… 새 날개 되겠다” 기사의 사진
홍의락 무소속 당선자가 20일 대구 태전동 선거사무소에서 4·13총선 과정의 에피소드와 향후 구상을 설명하고 있다. 대구=이병주 기자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대구인력(引力)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대구 유권자는 기표소에 들어가면 붓두껍을 쥔 손이 저절로 '1번'을 향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 이후 반세기 동안 작동해온 이 법칙이 박근혜 정권의 4·13총선에서 일부 기능을 멈췄다. 대구 북구을 유권자의 손은 1번 대신 '6번'을 향했다. 대구 인력을 거스른 야당 출신 무소속 홍의락(61) 당선자를 지난주 대구 선거사무소에서 만났다. 그는 당선 요인으로 대구 시민의 세 가지 '감정'을 꼽았다. ①변화에 대한 열망 ②상처 입은 자존심 ③홍의락에 대한 동정심. 어지간하면 참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마침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52.3%를 득표해 새누리당 양명모 후보(39%)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나.

“대구의 지역총생산(GRDP)은 24년째 꼴찌다. 골목상권을 비롯해 경제가 정말 어렵다.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다. 여당은 무조건 당선되니까 열심히 안 하고 야당은 해도 안 되니까 열심히 안 하는, 대구는 그런 곳이었다. 오래전에는 중앙 공무원도 대구에 내려왔다 가야 출세한다 했었는데 이젠 완전히 변방이 돼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진박’ 낙하산 후보를 내려보내 대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제가 민주통합당에서 19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던 건 대구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전국정당화를 위한 외연 확대가 제 역할이었고, 곧바로 대구로 이사해 4년간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비례대표 평가기준만 적용해 공천에서 앞뒤 없이 컷오프됐다. 이런 사정을 아는 지역 주민들이 저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던 듯하다.”

-무소속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2위와 표차가 1만4000표였다. 더민주 후보였어도 이기긴 했을 것 같다. 표차는 7000표 정도로 줄었을지 몰라도.”

-승기를 느낀 건 언제였나.

“1, 2월쯤 감이 오긴 했는데 3월 26일 선거사무소 개소식 때 깜짝 놀랐다. 지역 오피니언 리더인 분들이 자발적으로 정말 많이 와주셨다. 며칠 뒤 여론조사에서 15% 포인트 앞서는 걸로 나왔다.”

홍 당선자는 몇 해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랫동안 대구 민심은 정치인 박근혜를 대통령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제 목표가 달성됐으니 시민들도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구 시민의 생각은 어떤가. 변화가 느껴지나.

“대구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매우 크다. 그만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많다. 이번 표심은 박 대통령에게 ‘이제 3년 반 했으니 옷깃을 여미고 뒤를 돌아보고 잘 마무리하시라. 그래야 성공할 것 아니냐’고 충언을 한 거라 생각한다.”

-대구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뭔가.

“경쟁과 토론. 날개는 둘이 있어야 균형을 잡고 날 수 있는데, 대구는 너무 오랫동안 새누리당이라는 한쪽 날개로만 날려 했다. 대구가 어렵다고 하면 다른 지역에서 믿지 않는다. 아프고 힘들면 울어야 하는데 대구 사람 성정(性情)은 잘 그러지 않는다. 그 배경에 경쟁과 논쟁이 없는 정치문화가 있다. 제가 다른 쪽 날개가 돼 보려 한다.”

-지역구 활동은 어떻게 해왔나.

“대구는 국회의원 만나본 적이 별로 없는 동네다. 여당 의원은 굳이 안 그래도 되니까 안 내려오고, 야당은 내려올 의원이 거의 없었다. 지난해 1년간 매주 토요일을 ‘민원의 날’로 정해 제가 상주했다. 주민들이 오시면 얘기 들어드리고, 해결이 안 되면 왜 그런지 설명해드렸다. 그런 대화가 새로운 경험이었던 듯하다.”

-복당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

“제가 탈당해 출마하니 새누리당에선 ‘복당할 사람’이라 하고, 정의당에선 ‘새누리 입당할 사람’이라 했다. 그래서 복당도 입당도 안 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지금 여의도 정치는 너무 미시적이다. 정계개편 수준의 정치개혁 움직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당 구도가 이렇게 고착되지는 않을 거다. 그때 가서 합리적이고 새로운 모습의 변화가 생기면 주민과 상의해 결정하려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무소속으로 남아도 상관없다.”

-20대 국회에서 ‘이것만은 꼭 하겠다’ 하는 것은.

“영호남 문제는 많이 해소된 듯하다. 대신 수도권과 비수도권 문제가 심각하다. 균형발전이 중요한데 아직도 수도권에 돈 쓰면 투자, 지방에 쓰면 비용이라 생각한다. 이 격차를 줄이는 데 일조하고 싶다.”

-대구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에 대한 여론은 어떤가.

“김부겸-국민의당, 홍의락-국민의당 이렇게 교차투표한 유권자가 많았다. 새누리와 더민주가 싫어서 국민의당에 간 표다. 바둑은 이긴 사람도 복기를 한다. 안 대표도 이번 총선을 치밀하게 복기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고려대 학생운동에는 커다란 두 세력이 있었다. 청년문제연구회(청연)와 민족이념연구회(민연)가 유신체제 저항운동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대구 계성고 총학생회 간부였던 홍 당선자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진 1974년 고려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마산고 총학생회장을 지낸 설훈 의원과 함께 청연에 가입해 활동했다. 신계륜 의원, 문학진 임종인 전 의원,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이 당시 어울리던 친구들이었다.

-그때 ‘영종도 결사대’를 만들었다던데.

“조성우 선배, 설훈, 도천수 등 7명이 뭔가 해보자고 영종도에 들어갔다. 유신에 맞서 싸우자면서 혈서 쓰고 맹세하고 그랬었다. 엄혹한 때라 흐지부지됐는데, 저는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구속도 안 되고 졸업했다.”

생수병 콜라병 맥주병 등에 물 콜라 맥주를 넣어 뚜껑을 씌우고 라벨을 붙이는 공정을 ‘보틀링’이라 한다. 이 분야의 세계적 기업이 독일 크로네스인데, 홍 당선자는 크로네스코리아 대표를 20년 넘게 맡았다.

-사업하면서 돈은 좀 벌었나.

“대학 졸업하고 한동안 투병하다 오파상 들어갔다. 일하다 알게 된 독일 친구와의 인연으로 1992년 크로네스코리아를 설립했다. 합작이 아니라 경영권만 가진 거여서 돈은 별로 못 벌었다(웃음). 2013년 그만둘 때까지 회사를 꽤 키웠다. 웬만한 업체 보틀링 공정은 다 맡고 있다.”

-어떻게 정치를 하게 됐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던 2002년에 지역감정이 굉장히 깊다는 걸 느꼈다. 지역에 가서 정치를 해보자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열린우리당에 창당 발기인으로 들어갔고, 줄곧 경북도당에서 활동하다 2010년 경북지사 선거에 낙선했고, 2012년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김근태 계보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19대 비례대표 당선 뒤 그분이 잠든 모란공원에 가서 ‘어떡해야 합니까’ 물었었다. 이번에도 가보려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인人터뷰] 기사 모두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