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플라토 폐관, 두고만 봐야 하나 기사의 사진
작품도 파장 분위기를 아는 걸까. 전시장은 중국의 스타 작가 리우웨이의 대작으로 채웠지만 문상객 없는 초상집처럼 스산했다. 관람객보다 직원이 더 많았다. 최고의 기업이 최고의 공간(태평로 삼성생명 1층)에 세운 최고의 미술관 ‘플라토’는 그렇게 속절없이, 대책 없이 최후를 맞고 있었다. 데드라인이 8월 31일이라고 했다.

출발은 1999년 문을 연 로댕갤러리였다. 실내에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이 정좌했다. 둘의 가격이 100억원을 넘는다고 했다. 이병철-이건희로 이어오던 미술 애호의 마음이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유리구조물 ‘글래스 파빌리온’도 화제였다. 건축가 윌리엄 피더슨은 1150m² 전시장을 설계하면서 오로지 로댕만을 생각했다. 벽면과 천장까지 유리로 덮어 자연광이 조각을 비추도록 했다. 건축의 모티프도 로댕의 돌조각 ‘대성당’이었다. 한마디로 로댕을 위한 맞춤형 건물이었던 것이다.

의욕적인 전시기획으로 현대미술을 견인하던 로댕갤러리가 2011년 ‘플라토’로 이름을 바꾼 데는 삼성의 컬렉션을 의심하던 사회 분위기 영향이 컸다. 지금도 귀에 아른거리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사건이 그때 불거졌다. 요란한 플래시 세례 후 새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슬픔을 삼키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의례로 보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렇듯 시련을 견디며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미술공간이 졸지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삼성생명 건물이 부영그룹에 매각되면서 갤러리의 운명 또한 풍전등화라는 것이다. 이곳을 가본 사람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 갤러리 건물이 빌딩 외벽에 돌출해 있는 상태라 탁 털어버리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구조다.

방법은 딱 하나. 건물을 인수한 부영에 기대는 것이다. 자산 20조원에 재계 순위 21위 기업이 무지막지하게 갤러리 해체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나는 부영그룹 회장과 면식이 없지만 언론과 지인을 통해 들은 기업문화는 현대미술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어 보였다. 사무실 복도에는 소박한 풍경화들이 걸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영은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을 위해 KT와 경합했다. 개발도상에 있는 동남아 국가에 칠판과 악기, 졸업식노래를 보급했다. ‘6·25전쟁 1129일’ ‘광복 1775일’ 같은 역사적인 기록물을 펴냈다. 미래 꿈나무들을 위해 각종 학교에 기숙사를 기부했다. 이런 기업문화에서 걸음을 미술 쪽으로 한 발짝만 옮기면 좋은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사회공헌은 시민사회의 수요와 맞아떨어질 때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가.

그래도 망설여지면 수많은 사례 가운데 LA의 게티뮤지엄 학습을 권하고 싶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할리우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디즈니랜드를 많이 찾지만 사실상 산타모니카 산기슭에 자리한 이 미술관을 빼고는 말하기 어렵다. 전시, 공연, 교육장의 기능을 갖춘 이곳에서 나는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양피지를 직접 만져본 촉감, 반 고흐의 ‘아이리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석유재벌 장 폴 게티(1892∼1976)가 시민에게 헌정한 최고의 문화센터다.

부영은 인수한 건물을 호텔로 사용할 것을 논의하고 있다는데, 미술관은 신생 호텔을 알리는 이정표로도 그만이다. 같은 공간을 다시 짓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얼마나 경제적이고 효과적인가. 17년 동안 관람객의 심미안을 키워주며 도심의 오아시스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던 곳. 우리 문화공간도 세월의 이끼를 얹어가며 역사와 전통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건물주가 삼성이든, 부영이든, 문화는 물처럼 흐르도록 해야 한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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