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경제는 좋아졌는데 불행한 미국인 기사의 사진
“빌어먹을,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뉴욕. 지구온난화가 필요해.” “모유수유? 역겹고 끔찍하다.” “중국이 미국을 강간하게 놔두지 않겠다.” 이런 막말로 실소를 자아내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런데도 현실이 됐다면 그 원인 역시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경제는 좋아졌는데 미국인은 불행하다.’ 트럼프 현상의 원인은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미국 경제는 지금 눈부시게 회복했다. 민간영역 일자리는 역대 최장인 73개월째 늘어나고 있다. 실업률은 호황이던 레이건 정부 말기보다 낮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한 2009년 대비 지난해의 경제성장률은 프랑스의 2배인 13%가 넘는다. 오바마는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런 성과를 설명하며 “미국은 근대 이후 어떤 선진국보다 경제위기를 잘 극복했다”고 자평했다.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이런 경제 상황을 공략해 지지를 얻었다. 그는 미국 경제가 무너졌다고 외쳤다. “미국을 보면 제3세계 국가 같다. 뉴욕의 케네디 공항을 비롯해 전국 모든 공항의 시설이 엉망이다. 다리 고속도로 터널은 무너지고 있다.” 그를 대선 후보로 확정지은 인디애나주의 유권자 10명 중 9명은 가장 큰 걱정거리로 경제를 꼽았다. 중국 때문에, 이민자 때문에 미국 경제가 망가졌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샌더스 열풍과 트럼프 현상은 다르지 않다.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도 미국 경제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인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지만 부의 대부분을 극소수가 차지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다.”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그토록 공격하면서도 샌더스는 “대단한 양반”이라고 치켜세웠다. ‘경제 불만’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했는지 본선에서 샌더스 지지층을 끌어들이려 한다.

오바마가 제시한 경제 수치에는 오류가 없다. 미국 경제는 분명히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막말의 이단아와 부국(富國)의 사회주의자는 ‘경제가 문제’임을 내세워 미국인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 배경에는 ‘평균의 함정’이 자리 잡고 있다.

영어로 된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the’다. 2위 ‘of’의 빈도는 대개 the의 2분의 1이고, 3위 ‘and’는 3분의 1이다. 이런 비율로 줄다보면 수만개 단어 대다수는 있으나마나한 활용 빈도를 갖게 된다. 로또에서 1등이 당첨금 대부분을 가져가고 4등 이하는 별로 쥐는 게 없듯이, ‘지프의 법칙’은 상위권이 대부분을 차지해 중하위권 수치는 무의미해지는 분포를 말한다. 이럴 때 ‘평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009∼2013년 미국인의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이런 분포를 보였다. 상위 1%의 가처분소득이 11% 증가하는 동안 나머지 계층은 0%에 가깝거나 오히려 감소했다. 평균 증가율은 약 7%로 계산됐지만 이를 체감한 미국인은 별로 없는 셈이다. 기업별 이익률, 도시별 취업률, 심지어 흡연 감소율도 평균이 현실을 가리는 비슷한 그래프를 그렸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트럼프 지지층은 이렇게 가려진 저학력 블루칼라 계층이다.

이제 평균을 갖고 경제를 논해선 국민을 설득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미국인이 워싱턴 주류 정치권에 분노한 건 내 사정과 동떨어진 숫자만 얘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육박해 있다. 이게 4만 달러가 된다 한들 내 소득이 2만 달러도 안 된다면 삶은 나아지지 않고 박탈감만 커진다. 그런 이가 다수라면 사회적 분노로 분출될 것이다. 문제는 경제다? 문제는 격차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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