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또 다른 이란 안돼”… 반미 확산 우려 유혈진압 용인 기사의 사진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진압병력이 시위 참가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있는 장면.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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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군부와 광주 시민 간의 대화를 촉구했고, 신중한 군사작전을 통해 인명 피해의 최소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계엄군이 광주 대로변에서 총칼로 임신부, 어린이, 노약자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았던 상황을 고려하면 너무 안이하고 무책임한 대책이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은 왜 군부의 유혈 진압을 묵인했을까. 당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했던 도널드 그레그는 1980년 5월 20일 ‘계엄령 이후 한국’과 그 다음 날인 5월 21일 ‘한국 상황 후속 보고’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 두 건의 NSC 문서는 당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전반적인 결정이 내려졌던 5월 22일 NSC 정책검토위원회(PRC) 회의에 자료로 활용됐다.

국민일보가 입수한 이 문서들은 미국의 당시 판단에 대한 의문을 푸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김대중의 고향, 그리고 뿌리 깊은 지역감정

그레그는 ‘한국 상황 후속 보고’ 문서에서 “글라이스틴이 폭동이라고 언급한 것이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있으며 현재 체포돼 있는 대선 후보 김대중의 고향”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지역은 박정희와 현재 한국 지도자들을 배출한 더 중심적인 지방(영남)에 대해 역사적으로 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이곳의 소요는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진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생지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지만 당시 많은 미국 정부 관계자는 광주를 그의 고향이라고 봤다.

그레그의 분석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엄 철폐’ ‘군부 퇴진’ 등 민주화 요구로 시작했던 5·18민주화운동이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살인 진압을 겪으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시위로 확대됐다는 본질은 담지 못했다. 미국이 5·18민주화운동의 발생 원인을 정치적·역사적 요인에 치중하면서 당시 계엄군의 살인 진압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분노 등이 간과된 측면이 있다.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다행

미국은 당시 한국의 정세 불안으로 인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실제로 걱정했다. 그레그는 ‘전라남도가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다행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욱 폭발적이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남한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미국의 오판이 군부의 유혈 진압을 묵인한 결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른 지역에서는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당시 5·18민주화운동이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전 국민적인 반발의 시발점인지, 아니면 광주에 국한된 지역적인 반발인지를 파악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만약 다른 대도시로 파급됐다면 전두환 신군부는 궁지에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그는 ‘계엄령 이후 한국’ 문서에서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한국의 표면적인 상황을 중시하며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 않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것도 유혈 진압을 묵인한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간접적으로 입수한 보고에 의존한 미국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즉시 미국대사관 직원을 광주에 보내지 않은 점”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서울에서 군과 최규하 정부 지도자들을 통해 군부의 정보를 입수했으며 광주시민들의 상황은 몇몇 선교사, 그리고 윤공희 당시 광주 대주교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의존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주한 미국대사관이 간접적으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요 결정을 내렸다는 고백인 셈이다. 미국은 광주의 참혹상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반미 감정을 우려한 기계적 중립

미국은 광주시민과 군부 내부 양쪽에서 반미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레그는 “정부(군부)는 우리를 내정간섭으로, 반대세력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쪽에 현실적인 사고와 자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자제는 기계적인 중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군부의 무력 진압을 용인하면서 그 경계선마저 무너졌다.

또 다른 이란을 만들지 마라

미국은 중동의 친미국가였던 이란이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으로 반미 국가가 되자 충격을 받았다. 이란 혁명은 5·18민주화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레그는 ‘한국 상황 후속 보고’에서 ‘한반도 안보와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또 다른 이란’을 만들지 마라”-의회의 큰 우려)’라고 썼다. 5·18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한국이 반미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유혈 진압을 용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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