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이후 미국 문화원은 대학생들의 타깃이 됐다. 1980년대 초중반 광주 부산 대구 서울의 미국 문화원에서 대학생들의 방화·점거 시위가 6차례나 잇따라 발생했다.

미국은 전두환 신군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지역 언론을 통해 ‘미국도 강경 진압에 동의했다’는 악의적으로 왜곡한 정보를 퍼뜨렸다고 맹비난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볏단을 들고 불에 뛰어가는 것과 같다”면서 ‘김대중 체포’에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응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여기에는 미국의 현장 사령탑이었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책임이 적지 않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광주 도심에서 자행했던) 시민봉기를 야기한 공수부대의 야만적 행동은 우리(미국)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진행돼 우리를 경악시켰지만, 인명 살상을 최소화하면서 진행된 5월 27일의 군병력 재진입은 우리와 사전협의 하에 진행됐다”고 밝혔다.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대해 ‘인명 살상을 최소화하면서 진행’됐다고 설명하는 대목에 대해선 말문이 막힌다. 이 진압작전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 수가 160명에서 4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80년 5월 26일 작성된 백악관 상황실 문서에서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대해 ‘탈환(recapture)·재점령(re-occupy)’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한 미국대사가 ‘시민들이 점령했던 전남도청을 탈환한다’는 당시 군부의 시각에 경도돼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은 1979년 10·26 이후 미국 정부가 한국 상황만을 특별히 다룬 기밀문서들의 이름인 ‘체로키 파일’을 미국 정보공개법에 따라 입수했다. 셔록 기자는 80년 5월 22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검토위원회(PRC) 회의에서 광주의 질서 회복을 위해 무력 사용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보도했다. 그는 광주의 책임과 관련해 무관함을 주장하던 미국에 결정타를 날렸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하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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