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 전두환정권과 민주화 사이 ‘곡예외교’ 기사의 사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1987년 2월 7일 열린 ‘고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회’ 장면.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됐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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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츠 전 美국무장관, 민주화 변곡점서 왜 입장 바꿨나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1986년 5월 7∼8일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불붙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일본도 대통령 직선제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직선제만이 민주화를 위한 방안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전두환정권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면서 반미 감정을 자초했다.

그랬던 그가 87년 3월 6일, 10개월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딴판이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그는 “미국은 집회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 보장을 지지한다”면서 전두환정권을 압박했다.

미국의 궤도 수정…전두환정권 옹호에서 정부·야권 기계적 중립으로

한국의 민주화 시기 동안,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가 표현했던 것처럼 미국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했다. 무게중심이 전두환정권으로 기울었을 때 서슴없이 그쪽 편을 들었다가 궁지에 몰리자 발을 뺐다.

미국은 전두환정권을 지원하다가 민주화 파고가 전국을 뒤덮자 기계적 중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한국 정치 상황의 변화로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는 예측 가능한 정치체제를 더 선호했다.

국민일보는 민주화 격동기인 86∼87년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을 알 수 있는 주한 미국대사관,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들을 입수했다. 미국이 한국이라는 외줄에서 벌였던 아슬아슬한 곡예의 비밀이 이 문서들에 담겨 있다.

슐츠의 86년 방한…개헌 서명운동과 필리핀의 ‘피플파워’

슐츠 장관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여섯 차례 방한했다. 86년 5월 7∼8일 방한은 1박2일 일정이었지만 실제로는 ‘24시간’ 방한이었다. 87년 3월 6일엔 딱 다섯 시간만 한국에 체류했다. 이는 그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방한이었다. 눈 깜짝할 새 왔다가는 그를 향해 여야 모두 구애의 손길을 펼쳤다. 그게 현실이었다.

특히 슐츠의 86년 5월 방한 시점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야권은 86년 2월 12일,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1000만 개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나라 밖에서는 희망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2월 25일 필리핀에서 ‘피플파워’가 일어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권력을 몰아냈다. 피플파워는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자 이에 분노한 필리핀 국민이 일부 군부세력과 힘을 모아 이뤄낸 시민혁명으로, 21년 동안 장기 집권했던 마르코스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며 막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슐츠가 한국을 찾았다. 야권의 기대감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슐츠의 편파적 발언…“미국, 영국도 대통령 직선제 안 해”

슐츠는 방한 기간 내내 전두환정권을 감싸고돌았다. 강도도 셌다. 슐츠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야권에 찬물을 끼얹었다. “폭력을 통한 민주화 요구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며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을 공격했다.

그는 이어 “한국군의 능력이 확고하고 외침 위험이 상존해 있는 만큼 한국을 필리핀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인권 문제가 있다”면서 전두환정권의 인권탄압에 면죄부를 줬다.

슐츠가 대화와 타협을 언급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타협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인 89년에 개헌을 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을 야권이 수용할 것을 압박하는 겉치레 수사에 불과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슐츠의 방한은 한국의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전두환 일가는 부패”…문제점 알면서도 감쌌던 미국

미국은 86년 5월 슐츠 방한 당시에도 전두환정권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맹목적으로 두둔했다. 워커 주한 미국대사가 86년 4월 25일 미 국무부에 보낸 ‘슐츠 장관 방한 직전 한국 내부 정치 상황 평가’라는 제목의 문서는 이를 입증한다.

워커 대사는 “전두환정부의 경제적 성취는 인상적이지만 정치적 업적은 별로 없다”며 “정치적 성과에 대한 정부 자체 평가에서도 통행금지령 해제와 교복 자율화가 여전히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 전두환은 고립돼 있으며 황제식 스타일과 허세로 비판받고 있다”면서 “전두환과 청와대 참모진만이 전두환이 엄청나게 인기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전두환 가족의 평판은 필리핀 마르코스 가문의 악평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의 전력 역시 부패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두환이 퇴임 이후 가족의 안전과 편안함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서 “그의 참모들이 대기업들에 일해재단에 대한 기부를 쥐어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고민…“급진세력과 군부의 개입을 동시에 막아라”

그런 전두환정권을 미국이 옹호한 이유도 워커의 문서에 실려 있다.

워커는 “정부와 야당 간 교착상태는 국민이 양쪽 진영에 대해 신뢰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라며 “이러한 현상은 불행하게도 급진세력에 광범위한 활동 영역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군부의 동향도 면밀히 살폈다. 워커는 “질서가 붕괴된 것처럼 보이면 군부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며 “군부 개입은 전두환의 명령을 통해 이뤄질 수 있으며, 장군들이 전두환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좌우 양극단을 경계했던 것이다. 미국은 급진·폭력세력의 득세와 군부의 개입을 동시에 우려했다.

미국, “전두환이 군부 등 효율적인 지배수단 장악” 판단

미국의 입장에서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도 미덥지 못했다. 워커는 “신민당은 계파 갈등으로 국민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워커는 “전두환이 군부 등 효율적인 지배수단을 장악하고 있다”며 주목했다. 미국은 필리핀과 달리 군부와 경찰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전두환정권에 힘을 실어주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미국은 전두환은 물론 야권지도자 김대중에 대한 의심의 시선도 거두지 않았다.

워커 대사는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를 고수하거나 계엄령을 선포하는 경우, 1987년 대선을 부정선거로 치르는 경우, 쿠데타의 움직임이 있는 경우, 김대중이 폭력적인 결말을 결심한 경우 등 상황이 급격히 부정적으로 전환되면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스탠스를 준비해야 한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의 입장 변화…“집회의 자유와 인권도 보장돼야”

슐츠는 87년 3월 6일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민주화 열기가 전국을 휘몰아칠 때였다. 그는 전 전 대통령과 최광수 외무장관을 각각 만나 평화적 권력 이양을 강조했다.

슐츠 장관과 최 장관 간의 회담 내용을 기록한 기밀해제 문서는 미국의 입장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최 장관은 “(한국에서의)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달성하기 위해선 사회적·정치적 안정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슐츠는 “미국은 그 목표를 지지하지만 집회의 자유와 다른 기본적 인권 보장도 지지한다”고 맞받아쳤다. 이어 “폭력은 민주주의와 함께 갈 수 없다”면서 정부 측에 강경 진압 자제를 촉구했다.

87년 방한에서 슐츠는 보다 진정성 있게 대화와 타협을 촉구했다. 슐츠의 방한을 수행했던 개스틴 시거 차관보는 국무부 문서에 남한의 민주화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미국)는 정부와 야당 모두에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폭력과 물리력의 사용을 배제할 것을 계속적으로 요구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은 협상의 주체를 여야로 한정했다. 급진·폭력세력과 군부는 물론 학생과 시민사회 세력의 참여도 원치 않았다.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막고 예측 가능한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미국의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다. 한국 정치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기계적 중립을 택했던 미국의 노선은 반미 감정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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