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반기문 총장에 대한 씁쓸함 기사의 사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국내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기름 바른 장어’라는 별칭처럼 현안을 피해 매끄럽게 빠져나갈 것으로 짐작됐으나 오판이었다. 5박6일의 체류 기간 중 그의 움직임은 광폭이었다. 그러면서 메시지는 선명했다.

방한 첫날 관훈클럽 간담회에서부터 대권 의지를 드러냈다. TK(대구·경북)의 마음을 얻으려 찾은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제왕나무’라는 주목(朱木)을 심었다. 경북 도청 신청사를 방문한 데 이어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점심과 저녁을 함께했다. 언론의 촉각이 쏠렸던 김종필 전 총리와도 만나 30여분간 밀담을 나눴다. 고건, 노신영 전 국무총리 등 보수 원로 인사들과도 자리를 가졌다. “작심을 하고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일관된 처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발과 달리 말은 엇박자였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과열된다 싶으면 이미 살짝 한발씩 빼곤 했던 반 총장은 체류 마지막 날 기자회견에서 “저의 국내에서의 행동에 대해 과대 해석하거나 추측하거나 (하는 것을) 좀 삼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방한 중 활동과 관련해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지난 며칠간의 동선에 담긴 의미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대권행보 논란을 스스로 촉발해 국내 정치판을 온통 휘저어놓고는 뒤늦게 ‘과대 해석’ ‘추측 자제’ ‘오해’라며 빠져나가려 했다. 몸은 이미 정치판의 진흙탕에 있는데 마음은 구름 위의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이중 플레이인가. ‘중립 의무’를 요구하는 유엔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수순이라고 이해하더라도 무척 혼란스러웠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처럼 대놓고 말과 행동을 달리해도 괜찮은지 자문했다. 국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여기에는 호들갑을 떤 언론과 정치인들도 한몫을 했다. 반 총장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아주 능숙했다.

그는 이번 방한을 성공이라고 자평할지도 모른다. 지난주 한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지지도 1위를 차지한 사실에 고무됐을 수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번에 드러낸 지나친 정치공학적 행태가 길게 보면 감점 요인이 될 것 같다. 국민들이 그에게 보내는 환호는 현 정치권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기득권 정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지지의 원천이다. 그는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주의의 구태를 답습했다. “국가 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된다”고 본인이 주장하고는 반대로 갔다. 언제 적 JP인가. 연로해 건강이 좋지않은 원로에게 기대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TK를 아우르겠다는 발상이 딱 반 총장의 정치역량이다. 충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TK의 표심 역시 그렇게 단순할까. ‘우리가 남이가’라는 도식이 통하던 시대는 흘러갔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낡은 정치 프레임에 대한 경고는 지난 4·13총선에서 그 일단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불과 두 달여 전의 일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충분조건 중의 하나는 스스로 발현하는 것이다. 반 총장에게는 이를 위한 강인하고 저돌적인 힘이 보이지 않는다. ‘기름 바른 장어’의 올드보이식 ‘간보기’가 최정예 무기인 듯하다. 그마저 지역주의 패권에 바탕을 뒀다는 한계가 있다.

이번 방한으로 그는 대선 후보로서의 각인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 현상이 성공한 신화로 이어지려면 지금 같은 레퍼토리는 버려야 한다. 각인효과의 가장 가까운 곳에 낙인효과가 있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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