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맹경환] 서희의 담판이 필요할 때 기사의 사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과거 적국 베트남을 방문해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남중국해와 관련해 작은 나라들은 베트남이나 필리핀이고 큰 나라는 중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중국도 발끈했다.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바로 “국가의 크기가 그 국가의 합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돼선 안 된다”고 맞받아쳤다. 이후 두 강대국의 신경전이 상당히 날카로워지고 있다. 발단은 가장 첨예한 남중국해 문제다. 힘없는 주변국들은 한편에서는 두 강대국의 회유를 받고 한편에서는 줄서기를 강요받는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이 대표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 초 아세안국가 정상들을 초청해 남중국해 분쟁 해결을 위해 공통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어릴 적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친분도 과시했다. 지난 4월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캄보디아, 브루나이, 라오스를 찾아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과 아세안 전체와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이해가 걸려있는 일부 당사국 간 이슈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다른 아세안 국가들이 난리가 나자 캄보디아는 부인했고, 브루나이와 라오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일 캄보디아 국왕을 베이징으로 초청해 “중국은 캄보디아의 위대한 친구”라는 말을 이끌어냈다.

미국의 무기가 ‘안보’라면 중국의 무기는 ‘경제’다. 지난 4월 리커창 총리는 보아오포럼을 계기로 미얀마와 베트남 등 메콩강 유역 5개국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제1차 란창강-메콩강 정상회의’를 열어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정상회담 1주일 전에는 가뭄에 허덕이던 메콩강 중하류 지역 국가들을 위해 상류댐 수문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선심을 쓴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까불면 재미없다는 영향력을 과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세안 국가들이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을 강요받는 것에 비하면 아직 한국은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남중국해 문제는 침묵을 지키면 되고 북핵 문제만큼은 중국과 미국이 한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두 강대국의 갈등과 자존심 싸움이 서서히 북핵 문제로 표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주 이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의 방중과 시진핑 주석과의 면담이 중요한 계기였다. 중국이 미국 보란 듯 북한을 껴안자 미국은 북한을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해 버렸다. 문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를 미국이 다시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사드는 시 주석부터 시작해 중국 관리는 물론 학자들까지 동원돼 우려를 표명했던 사안이다. 사드 배치가 공론화된다면 중국이 뒷짐 지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제 한국도 중국이냐 미국이냐의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이 다가올 수 있다. 우리 역사 속 선택의 순간들처럼 말이다.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선택의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잘못된 선택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명·청 교체기의 조선이다.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 조선은 오랑캐 청나라와 싸우자고 했고 삼전도에서 왕이 무릎을 꿇는 치욕으로 끝을 맺었다. 고려는 달랐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의 소손녕에 맞서 서희는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손에 넣었다. 당시 송과 거란 사이의 국제정치적 판세를 서희는 정확히 읽어 냈다. 이제 우리가 조선의 길을 걸을지 고려의 길을 걸을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서희가 필요할 때다. 베이징=맹경환 특파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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