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강창욱] 엄마 품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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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그 여자는 몇 달 새 10년은 더 늙어버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직 서른 초반. 그는 배가 한껏 불러 있었다. 온몸의 기운을 뱃속의 아이에게 빼앗긴 것일까. 차례로 서리가 내려앉듯 하얀 머리칼이 정수리에서부터 솟아나와 사방을 꼼꼼하게 덮어 가고 있었다. 어떤 재앙과도 같은 속도로. 그리고 얼굴은 메마르고 창백했다. 눈썹마저 세어서 색채를 잃은 얼굴과의 경계가 흐렸다. 피부는 윤기와 탄력을 잃고 곳곳에 주름을 내주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와 목숨을 나누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속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일은 숭고하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슬펐다.

얼마 후 그는 아이를 낳았고, 젊음은 마법처럼 돌아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은 정원을 보는 듯했다. 황막함은 온데간데없고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그 ‘싱그러운 정원’에 아이가 파묻히듯 안겨 있었다. 하나의 목숨이 완벽히 분리된 두 개의 목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래의 여자들이 아이를 갖고 낳는 것을 보면서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이 아이 낳는 걸 볼 때는 떠올리지 못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아이를 출산해내는 것을 볼 때마다 여자의 몸이 남자의 몸보다 우월한 것이구나, 생각한다. 생명을 혼자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잉태된 생명을 사람의 꼴로 갖추어 가도록 하는 일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잘 만든 인큐베이터도 여자의 몸보다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여자의 몸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사실과, 사람은 여자의 몸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모두 놀랍다.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 테지만 요즘 여자들의 불러온 배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그 배를 보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아기가 보이는 것만 같다. 어려서부터 알아온 여자들이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서른이 넘고, 결혼도 하고, 무사히 아이를 낳고 있다. 그들이 낳은 아이를 보면서 몸에서 또 다른 몸이 나왔다는 사실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들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어느새 커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그러다 아이 낳는 고통을 상상해보는데, 남자인 나는 평생 그 고통 근처에도 가볼 수 없다는 사실만 남는다.

성서적으로 애 낳는 고통은 평생 땀 흘려 일하는 고통과 대등하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그 두 가지는 남녀가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은 벌로 각각 받은 형량으로 설명돼 있다. 여자는 수고롭게 아이를 낳아야 하고, 남자는 죽을 때까지 땀 흘려 일해야 한다. 그렇게 아이 낳는 것과 일하는 것은 본래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요즘 여자들은 갑자기 무슨 죄를 지었기에 두 가지 고통을 다 떠안게 됐을까. 남자라고 편해진 것도 아니다.

어느 아침 출근길 빌라 계단을 내려가다 아랫집 여자아이와 마주쳤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사한 아랫집은 유난히 시끄러운 집이었다. 싸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 집에서 40대 초반의 아빠, 할머니·할아버지와 살았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밤 만취해 돌아와서는 굳게 잠긴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고 소리는 방음이 부실한 빌라 전체를 흔들었다. 나는 그 집 남자와 노인들은 봤지만 엄마인 여자와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엄마는 함께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 얼굴을 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아이는 여러 구석이 아빠를 닮아 있었다. 나는 아이 얼굴에서 아빠의 얼굴을 나누어 내가 본 적 없는 아이 엄마의 얼굴을 역산해보려 했다. 한 사람의 얼굴은 그를 낳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나온 값일 것이다. 그 결합의 함수는 사람이 밝혀내기엔 너무나 복잡하겠지만 덧셈보단 곱셈에 가까울 거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아이에게 아빠의 눈과 광대뼈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엄마의 눈과 광대뼈의 값이 1에 가까웠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구체적인 아이 엄마 얼굴까지 계산해낼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아랫집에서 거대한 소란이 일어날 때면 그 전쟁 통에 놓인 아이와 얼굴 없는 아이 엄마가 함께 떠올랐다.

얼마 전 한 지하철역에서 엄마에게 안긴 아기는 무심히 나를 올려다보다 졸린 듯 눈을 감았다. 그날 나는 유난히도 지쳐 있었는지 그 아이처럼 작고 약한 존재가 되어서 엄마 품에 안겨 나른하게 잠들고 싶었다. 사랑도 아픔도 증오도 모르고 언제든 긴긴 밤인 것처럼. 그 품에선 엄마가 우주일 것이다. 어머니의 환갑을 며칠 앞두고 그런 ‘엄마 품’이 그리워졌다.

강창욱 사회부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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