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바지사장 쿠데타’ 격하… 본래 의도와 달리 민주화 과정 촉매제 역할 기사의 사진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이민우 구상’과 관련해 1987년 3월 10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기밀해제 문서. 문서에는 양김이 미국의 잘못된 이민우 구상 지원을 비판했다고 쓰여 있다. 출처=미국 디지털 국가안보 기록보관소
‘이민우 구상’의 핵심은 7가지 민주화 선행조치들이 이뤄질 경우 전두환정권과 내각제 개헌 협상을 검토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제시했던 민주화 7개항은 ‘공정한 국회의원선거법’ ‘집회·결사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 ‘언론자유 보장 및 언론기본법 폐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용공분자를 제외한 양심수 석방과 사면복권’ ‘2개 이상의 정당제도 확립’ ‘지방자치제 실시’였다.

이민우 구상은 ‘바지사장의 쿠데타’로 격하되기도 했다. 당시 야권 지도자였던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이 총재에게 신민당을 맡겼기 때문이다. YS와 DJ는 각각 신민당 상임고문과 민추협 공동의장을 지내며 신민당 지도부에는 한발 물러나 있었다. 이 총재는 신민당을 양분했던 양김을 겨냥해 기습 공격을 감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민우 구상이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한국 민주화 과정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민우 구상은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막바지 진통이었다.

이민우 구상으로 촉발된 야권의 분열은 전두환 대통령이 87년 4월 13일 밝힌 ‘호헌 조치’의 구실로 악용됐다. 전 대통령은 개헌 논의 중단을 선언하면서 87년 말 대선을 당시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치르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전 대통령은 “야당의 극심한 내부 혼란으로 합의 개헌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며 야당 탓을 했다.

미국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 대통령 직선제보다 여야 합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내각제 개헌이 차선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전두환정권이 이민우 구상을 통해 최소한의 조치를 단행하면 한국에서의 민주화 요구가 수그러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민우 구상은 양김이 야당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총재가 이민우 구상을 포기하지 않자 양김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DJ가 사면복권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YS가 총재직을 맡았다. 당시 안전기획부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들이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방해했던 ‘용팔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간접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는 전 대통령의 호헌조치는 전 국민적 반발을 야기했다. 박종철·이한열군 사망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벼랑에 몰린 전두환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며 민심 수습을 시도했다.

이민우 구상은 본래 의도와 달리 호헌 조치, 통일민주당 창당, 6·29선언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하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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