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개스틴 시거 차관보는 한국 민주화 큰 역할… 노태우 “바둑 훈수 두다 위기” 면전서 경고 기사의 사진
개스틴 시거(사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미국 정부 인사다.

그는 1987년 2월 6일 뉴욕에서 ‘한미협회’가 주최한 모임에 참석해 ‘전환기의 한국정치’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시거 차관보가 “군부는 한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나 이제 한국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며 민주화 지지 의사를 밝혔을 때 미국 정부조차 당황했다.

그런 시거가 87년 6월 민주항쟁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방한했으니 전두환정권의 마음이 고울 리 없었다. 시거는 DJ와의 회동뿐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도 냉대를 겪어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6월 24일 오전에 이뤄진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의 회동이었다.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이 회동 내용을 소상히 기록해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국민일보는 이 기밀해제 문서를 입수했다.

시거는 노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 상황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면서도 “권력 이양은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하며 한국정부는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 대표는 “민정당은 야당이 과격 세력과 단절한다면 언제라도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비꼬듯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면 민정당의 이 같은 굳은 결의를 전해 달라”고 말했다. 릴리 대사는 문서에 “노 대표는 시거가 김영삼과 김대중을 만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노 대표는 더 강력한 돌직구를 던졌다. 그는 “매우 자주 바둑에서 훈수를 자청한 사람들이 큰 위기에 부닥친다”며 “미국이 조언 이상의 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면전에서 경고했다. 이어 “한국 국민들은 미국이 정치적 변화를 달성할 유일한 세력이라는 과도한 기대를 가질 수도 있으며 이는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거는 “노 대표가 바둑을 잘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는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기원한다”면서 말싸움을 피했다. 회동을 지켜본 릴리 대사는 “노 대표가 시거와의 회동에서 평상시 자신을 절제하는 스타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 회동에는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노 대표의 특보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실장은 회동 전 릴리 대사에게 “노 대표는 지금이 5공화국 역사와 한국의 지도자가 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시거는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지만 80년대 한국 시장 개방 압력에도 앞장섰다.

▶[美정부 기밀해제 문서 단독 입수 모두 보기 클릭]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하윤해 기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