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국가가 무시당하고 있다 기사의 사진
많은 이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언제 터질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이처럼 컸던 적이 있었던가.

2년 전 세월호 참사와 1년 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마음속에는 근본적인 의문이 싹텄다. “국가란 무엇인가.” 다수가 자문해 봤다. “이 나라가 나를, 내 가족을, 내 공동체를 지켜줄 수 있을까.” 두 사건 모두 전례가 없었던 만큼 후유증 역시 잔인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한 잠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가 ‘대한민국’이 자국민의 생명을 담보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懷疑)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국가가 무시당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폭스바겐 사건, 서해 중국어선 사건….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며 유럽에서는 판매되지 않은 살균제가 한국에선 버젓이 팔렸다. 옥시레킷벤키저의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가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 실험 필요성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황도 알려졌다. 수백명의 한국인이 죽어 나갔고 2011년부터 이 문제가 공론화됐지만 이 외국 회사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검찰이 수사를 벌이기 전까지 우리 국민에게 고개 한번 숙이지 않았다. 한국은 철저히 우롱당했다.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에도 한국은 아주 만만한 나라다. ‘연비 조작’ ‘꼼수 과징금’ ‘부품 바꿔치기’ ‘리콜 거부’. 폭스바겐이 이 나라에서 한 일들이다. 최근엔 국내 배출가스 기준을 맞추기 위해 디젤차뿐만 아니라 휘발유차의 소프트웨어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본사 지시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폭스바겐이 한국 정부에 제출한 서류 중 조작이 확인된 것만 139건에 달한다.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리콜과 보상도 우리에겐 일언반구 없다.

얼마 전에는 국가를 대신해 어민이 나섰다. 연평도 어민들은 삶의 터전인 바다를 지키기 위해 직접 중국어선을 나포했다. 이들이 수년째 해양 경찰과 당국에 단속을 호소하는 동안 중국 어민들은 한국 정부를 우습게 알았다. 대표적인 게 이 정도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국가 ‘대한민국’은 무시를 당하고 있다.

무시는 불만과 불신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왜 우리나라는 당하고만 있는가. 왜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국민이 해야 하는가. 결국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하나.” 국민들 반응이다. 더 큰 문제는 불만과 불신이 분노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고 터지고 있는 혐오 범죄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 많은 국민이 걱정하고 있는 것도 이 대목이다. 국가에 대한 무시는 국민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법칙이다.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면밀히 살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고치면 대형 사고나 실패를 방지할 수 있지만, 징후가 있음에도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국가 무시→국민 불신→국민 분노’의 악순환이 혹 이 법칙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숨을 죽이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유다. 해법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일소할 수 없다면, 어느 하나라도 쳐내야 한다. 또다시 민낯을 드러낸 재벌가와 법조계 비리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99%가 재차 묻는다. “우리 국가의 수준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이 땅의 지도층이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