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수직적 기업문화 허물기… 창의성 향상으로 이어질까

호칭 파괴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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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CJ CGV에 경력 입사한 윤모씨(35)는 당시 접한 새 직장의 분위기를 ‘문화충격’으로 표현했다. 이전 한국식 직위 호명에 익숙했던 윤씨는 CGV에 발을 딛는 순간 서로를 OOO님이라고 부르는 환경에 당황했다. 윤씨는 7일 “처음에는 임원이나 고참이 불쾌하지 않을까 생각해 ‘님’자를 붙이지 못하고 (결재 자리 등에서)어쩔줄 모른 채 서있기만 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수평적 호칭 등을 골자로 하는 인사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임직원 간 공통 호칭은 ‘OOO님’으로 통일하되 부서 내에서는 업무 성격에 따라 님, 프로, 영어 이름 등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변화는 창의적·수평적 조직문화 조성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대리-과장-차장-부장-임원이라는 위계 호칭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강고하지만 기업의 글로벌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소통과 상대에 대한 존중, 일의 책임감 차원에서 기업들은 직급별 호칭을 연성화하거나 단순화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특성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호칭을 통일해 좋은 성과를 낸 것만은 아니다. 호칭만 바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기업의 시스템을 유연하게 하고 시대흐름에 맞는 변화를 병행해야 기업문화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여전하다. 16년 전 CJ가 시작한 직장내 호칭 격식 파괴는 지금 우리 기업에게 기대와 과제를 동시에 안겨주는 화두가 되고 있다.

CJ, 밀레니엄을 호칭 변화로 시작

이재현 CJ그룹 회장(당시 제일제당그룹 부회장)은 21세기를 코앞에 둔 1999년 어느날 임원회의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앞으로 직급, 직책으로 불리던 호칭 대신 ‘님’자를 붙입시다.” 참석 임원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되면 조직 내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며 만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 회장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직원들의 창의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칭 파괴는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문화가 바뀌어야 살 수 있습니다.” 96년 삼성으로부터 분리한 뒤 설탕·밀가루 생산 회사에서 식품서비스, 유통, 엔터테인먼트로 사업다각화를 시작한 당시 상황도 기업문화 혁신의 절박함을 부르는데 일조했다.

CJ는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등을 벌인 끝에 호칭을 ‘성이름+님’으로 결정했고 2000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밀레니엄 시대의 첫 출근일, CJ직원들의 인사는 “OOO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였다. 그렇지만 변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초기에 아랫사람은 ‘상사가 기분나빠하지 않을까’하고, 상사는 ‘어린 녀석에게 굽신거리는 것 같아’ ‘님’자가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룹 경영회의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회장님”하고 무심결에 존칭을 쓰면 이재현 회장의 불호령이 어김없이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려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CJ그룹 관계자는 “선후배 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젊거나 직급이 낮은 사람의 생각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CJ의 호칭 파괴는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2002년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이 ‘님’ 호칭을 썼으며 2006년 SK텔레콤은 일반직원의 호칭을 매니저로 바꿨다. 그해 SK텔레콤 영업센터에 입사한 강모씨(35)는 “처음에는 주변으로부터 직급 없이 ∼씨로 불렸다가 매니저님이라는 호칭을 얻게 돼 어깨가 으쓱해졌다”며 “사원에서 마치 직급이 하나 생긴 것 같아 일과 조직에 대한 책임감이 더 느껴졌다”고 말했다. 제일기획은 2010년부터 임직원 호칭을 ‘프로’로, 이듬해 포스코는 직원들을 매니저로 부르도록 했다.

삼성 일부 계열사는 올들어 호칭 변화의 물결을 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는 기존 직급 대신 프로와 담당으로 호칭을 바꿨고, 삼성전자도 지난달 말 기존의 직급 체계를 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KT와 한화는 유턴하기도

기업의 호칭 격식파괴가 순풍만을 타지는 않았다. 기업의 전통과 특성, 오너의 사고방식 등이 전부 상이한 상황에서 한가지 틀만 고집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KT는 2012년 11월 사원∼부장 직급을 매니저로 바꿨지만 2014년 6월 직급제를 부활시켰다. 한화그룹도 2012년 매니저 제도를 도입했으나 약 2년4개월만인 2015년 초 회귀했다.

두 기업 모두 효율성을 고려해 직급제로 복귀했다고 입을 모은다. KT 관계자는 “직원들 사기를 되살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했다. 매니저 제도 하에서는 팀장을 빼고 다 매니저여서 대리 과장 차장으로 올라가는 목표의식이 다소 희박했다는 얘기다.

한화 관계자 역시 “매니저 제도를 시행하면서 중소기업 등 고객들이 차장, 과장 등의 구체적인 직급을 다시 물어보는 등 불편을 초래해 ‘고객우선’ 차원에서 기존 직급 제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눈길을 끈 것은 이 두 기업의 호칭 변화와 회귀는 시기적으로 그룹 경영자의 교체·공백기와 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KT는 이석채 전 회장때 매니저제를 도입했다가 황창규 회장 취임 이후에 직급제로 돌아갔다. 한화 역시 2014년 김승연 회장의 경영일선 복귀 이후 호칭 변화가 없던 일이 됐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기업문화도 CEO 및 오너의 철학을 반영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업 시스템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

기업들이 호칭을 단순화하는 것은 삼성전자의 발표대로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과 이를 통한 창의적 사고와 기업내 소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호칭 변화가 기업문화 개선의 일부가 될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이경상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다른 것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호칭만 바꾼다고 능사는 아니다”며 “일하는 방식이나 기업의 상·하부구조의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를 들어 구태의연한 회의나 보고 문화, 빈번한 야근, 의전중시 등의 풍토가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칭 변화처럼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기업들은 조직문화의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대한상의가 지난달 1일 개최한 ‘기업문화와 기업경쟁력 컨퍼런스’ 참가자 203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98.5%가 “기업경쟁력은 기업문화에 영향받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91.0%는 “현재 기업문화로는 경쟁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대답, 기업문화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문화 개선이 어려운 이유로 ‘기업의 시스템, 제도변화 없는 이벤트 활동’(22.5%)과 ‘단기적, 가시적 성과 기대’(20.9%)가 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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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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